발해 사학사 연구 송기호 지음 “발해에 겹쳐진 역사와 지리관계의 이해” 발해에 대해서 어릴 적 처음 발해에 대해서 배울 때 굉장히 신기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국가 중에 가장 면적도 크고, 통일신라시대와 동시대의 국가라 고대 국가로 거슬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아 베일에 싸인 느낌이었다. 무협소설에 나올 법한 신비로운 국가의 이미지랄까. 수업에서도 신라와의 관계에 집중했을 뿐, 깊게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발해는 거의 내 기억 속에 잊힌 나라였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송기호 교수의 발해 3부작 중 마지막인 는 그간 저자가 작성한 연구 논문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룬 국가로..
공간, 장소, 젠더 도린 매시 지음, 정현주 옮김 “공간, 장소에 대한 관계적 이해" 공간에 내재된 다양한 관계들 공간은 기본적으로 불평등하다. 토지는 한정적이고 그 생산성과 위치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차등적인 공간구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관계로 공간이 재편되는 경우가 많고, 생산수단을 지닌 기업이나 자본가, 혹은 전문가들이 특정 공간을 점유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경제적 우위가 공간적인 우위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다양하고 다층적인 맥락의 권력관계가 양산되고 공간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영국의 저명한 지리학자 도린 매시는 책을 통해 그 공간과 장소에 내재한 차이에 대한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가 가진 사고의 핵심 단어는 ‘관계’인데, 사회적 상호 관계나 경제..
옐로우 퍼시픽 –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 조영한, 조영헌 지음 "근대성에 대한 이해와 확장의 출발점" 글로벌과 로컬의 변주 속에서 지난하고 긴 코로나 시대에서 한국 바깥에 닿는 방법 중 하나는 미디어였다.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BTS가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하며 ‘아미’가 된 사람들이 늘어났고, 파울로 코엘료가 트위터를 통해 드라마 를 극찬한 것을 계기로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가 다시 인기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다방면에 걸쳐서 해외에 퍼지고 있는 K-문화의 위상 덕택에 한국 문화가 외국에서 소비될 때 느낄 수 있는 ‘국뽕’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의 문화가 변방이라는 위치성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의 로컬 발언을 필두..
위험한 위험 - 위험으로의 초대 석승훈 지음 "위험의 전가와 통합에 관한 다층적 과정" 위험에 대해 안다는 것 사회의 발전은 위험의 관리와 궤를 같이 한다.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도 결국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생존의 문제를 어디까지 사회의 위험으로 관리할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위험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먼저 알아야 적절한 계획과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배달 노동자와 같이 특수고용노동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고용보험을 확대하자는 목소리도 결국 고용보험에 배제된 사람들이 늘어난 것을 우리 사회가 점차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생활에서 위험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위험은 그저 예..
과학의 씨앗 – 나는 어떻게 GMO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나 마크 라이너스 저 – 조형택 옮김 반 GMO에 대한 반대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마트에 가면 원산지 논쟁은 유독 두부 코너에서 잦은 것 같다. 오늘도 그랬다. “국내산인거 확인했니?” 어느 아주머니가 아들로 보이는 아이에게 조용히 나무라듯 말했다. “이게 더 싼데...”라고 중얼거리는 아이에게 두부는 꼭 국내산을 먹어야 한다며, 1+1으로 포장된 두부를 내려놓고 낱개로 된 두부로 다시 담았다. 그녀가 집어든 두부에는 ‘100% 국내산’ 라는 문구가 단짝 친구처럼 상품명 바로 옆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사람도, 농산물도 자유롭게 오가는 시대에 수입산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음식 재료가 쉽게 있을까 싶지만, 두부에 대한 시선이 유독 까..
인간을 다시 묻는다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편 권재일 외 "인간의 조건에 대한 다층적 가능성 "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의 근황 토크에서 그는 “맨날 기계처럼 일만 해. 감정이 고갈되는 느낌이야.”라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쯤 맘 편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지?” 라고 되물었다. 선배에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자유가 곧 인간성의 획득 과정이었다. 코로나 시대로 접어 들면서 근무환경이 유연해진 것을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이라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을 필요로 할까. 선배에게는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듯이 생물학적 신체는 인간이 될..
오차 분석 입문 - 자연과학적 측정에서 불확실성의 탐구 존 테일러 지음 / 김재관 옮김 차이를 해석하는 과정 오차에 대한 두려움 학부 때 건축학을 전공하면서 차이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도면을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차 - 예를 들어 2,400mm의 복도 폭을 그리는 과정에서 모종의 이유로 3mm가 더해져 2,403mm로 그려진다든지 - 는 밤을 새게 만드는 큰 요인 중 하나였다.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나고, 내부와 외부 공간이 형성되면서 애매한 수치로 그려지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한다. 사람이 그리는 일이니 실수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도면의 숫자들도 지저분해질 뿐더러, 실제로 시공으로 이어질 경우 예기치 못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에 항상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
북한, 조선으로 다시 읽다 김병로 지음 21세기의 북한을 이해하다 조선은 우리 옆에 아직 있다 작년, KBS에서 3.1운동 100주년의 특집으로 한편의 다큐를 기획했다. 주제는 재일동포와 일본 내 조선학교. 이 다큐에서 나는 학생들의 입에서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조선’이라는 단어를 듣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제 4세대에 가깝게 흘러 온 만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조차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한국도 아닌, 조선이라니. 학생들은 북한에 교류 및 수학여행을 가서 북한의 또래 학생들과 재회하며 눈물을 흘렸고, 여전히 ‘조선’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강력한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COVID-19 상황이 발생하기 직전인 올해 초, 가족과 함께 일본 가고시마 ..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 - 인본주의적 가치의 붕괴와 후기 근대의 디스토피아 신정현 지음 삶의 가치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21세기의 사파리 0.8명. 얼마 전 예측된 올해의 우리나라 출산율 숫자다. 물론 무척 충격적이지만, 그 누구도 이제 쉽게 놀라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100년 후에는 한국인이 사라질 수 있다는 침울한 전망을 내 놓아도 그 수치는 미래의 누군가의 몫일뿐이다. 이미 저출산은 10년이 넘게 정책의 단골 소재이자, 항상 주연으로 정치판에 등장했음에도 큰 효과가 없는 것을 보면, 애초에 그 무대에 배우를 잘못 기용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무슨 홍삼도 아닌데 3,5,7포로 이어지며 삶의 기본적인 조건을 하나, 둘씩 포기 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쉽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라”, “그 속에 탄..
한국의 노숙인 - 그 삶을 이해한다는 것 구인회, 정근식, 신명호 편저 노숙으로 가는 과정들 무엇이 노숙으로 이끄는가 얼마 전, 본가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을 갔다가 광장에서 한 여성을 보았다. 대략 오전 9시 정도 되었을까, 오른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바치고 무언가를 요청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간에 쫓겨 다시 떠나갈 때까지 그녀는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불편한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왜인지 돈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구걸의 필수 물건인 돈바구니를 구할 시간도 없었던 것일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난 누군가에게 그 마음의 짐을 떠넘기듯 서울역 안으로 발걸음을 서둘러 재촉해 버리고 말았다. 서늘한 아..
유럽의 발흥 - 비교경제사 연구 양동휴 지음 유럽은 어떻게 아시아를 앞지르게 되었을까 유럽은 원래부터 잘 나가지 않았다 인류사가 쓰이기 시작한 비교적 긴 시간 동안, 현재 유럽으로 통칭되는 일대가 ‘내가 제일 잘 나가’를 외치기 시작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다시 더듬어 보면 소위 인류 4대 문명이라는 지역도 유럽과는 비교적 떨어져 있으며, 세계인의 삶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는 종이, 화약과 같은 상품들도 중국에서 먼저 발명되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이 중국에 1,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배경에도 무역상품의 불균형, 즉 영국이 중국에 팔 만한 거라고는 아편이 큰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중국이나 인도 등에서 생산되었던 상품들은 비교적 최근의 시기까지도..
독일 근현대 주거건축 - 독일 근현대 주거건축의 양식과 미학적 전통 전남일 지음 주거 건축의 양식과 형태에 대하여 20세기 주거건축의 연대기 도시 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다 보면 도로와 도로 사이,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속에서 각각의 건물들을 살피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많은 건물들을 졸업앨범처럼 하나씩 보다 보면, 수많은 건물들의 외양과 형태 속에서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돌출된 창의 모양이라던지, 장식적인 측면이 가미된 벽감, 넓게는 재료의 사용이나 구축 방법에서 그 유사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단일한 도시 공간 속에서도 서로 다른 건물들의 혼재된 모습은 시간의 지층이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그 중에서도 주거공간은 그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유..
재일동포 정진성 지음 "역사의 무게를 온 몸으로 받으며 버티는 삶" 진짜 바퀴벌레는 누구인가 작년, 2017년에 개봉한 이일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를 본 적이 있다.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속칭 ‘재특회’라 불리는 극우 집단의 혐한 시위에 맞서는 일본인들을 다룬다. 그들은 전직 야쿠자 출신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카운터스’라는 집단으로, 무식할 정도의 육탄전으로 강렬하게 저항하며 재특회와 공권력에 저항하며 싸운다. 일장기를 흔들며 “조선인을 죽이자”라고 외치는 재특회 앞에서 “진짜 바퀴벌레는 너희다”라며 돌진하는 그들의 싸움은 스크린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건 잠시일 뿐, 화면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중적 시선과 태도, 그리고 그것을 감..
공간으로 세상 읽기 - 전상인 "각 시대를 풍미했던 잔해들의 축적들" 서울 중의 서울 장충동의 동국대입구역 앞에는 오래된 빵집이 하나 있다. 대를 이어 살아남은, 서울 안에서는 꽤 유서있는 빵집인데 ‘과자 중의 과자’ 라는게 이 가게의 표어이다. 요새는 찾아보기 힘든 버터케이크나 사라다빵, 각종 쿠키가 진열대에 빼곡히 자리잡고 있고 옛날도너츠나 생크림빵 같은 기본적인 종류들도 매대 위에 가득히 채워져 있다. 요새 유행하는 아틀리에 베이커리들을 비웃듯이 온갖 빵이 수북히 쌓여 있고 북적이는 가게 속에서 사람들은 한아름씩 빵을 사들고 문 밖을 나선다. 솔직히 그리 대단한 맛은 아닌 듯 하지만 그 인파에 홀리듯 나도 빵을 몇 개씩 집어들곤 했다. 10여년 전, 지방에서 처음 올라와 경험한 서울은 그 빵집과 비..
사당동 더하기 25 — 조은 “난 가난하지만 가난하다고 생각 안 해.” 빈곤을 기록한다는 것에 대하여 작년 나는 약 6개월 간 서울 남쪽에 위치한 구룡마을에 대한 공간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무허가로 점거하고 있는 집들을 철거하기에 앞서, 약 800여 세대에 대한 실태조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지리학과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는데 나의 임무는 그들이 사는 공간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의 면적과 시설, 환경 등을 건축 도면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꼼꼼히 기록하였는데 연탄 양동이 하나, 양말 한 켤레도 모두 기록에 담았다. 그리고 끝으로 왜 구룡마을에 살게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간략하게 인터뷰를 통해 구술사도 진행하였다. 이 일은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악취가 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게오르그 짐멜 "근대 속 인간의 삶 그 자체" 단면에 담긴 세상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 쓴 이라는 책을 무척 좋아한다. 저자의 담담한 말투와 더불어 ‘단편적’이란 단어가 가지는 이중적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아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볍지만 무거운, 일상적이지만 비범한 생의 단면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의 큰 법칙이 아닌 무수한 단편들의 집합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보다 사소한 것들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관찰을 갖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또 한 명의 애정하는 사회학자가 될 것 같다. 당연히 짐멜의 존재에 대해 모른 것은 아니었고 풍문처럼 그의 사상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했었지만 그의 책을 정식으로 대면한 것은 부끄럽게도 이번이 처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