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삶에 대한 기록과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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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동 더하기 25 — 조은

     

    “난 가난하지만 가난하다고 생각 안 해.”

     

    빈곤하다는 것, 빈곤한 공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빈곤을 기록한다는 것에 대하여

     작년 나는 약 6개월 간 서울 남쪽에 위치한 구룡마을에 대한 공간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무허가로 점거하고 있는 집들을 철거하기에 앞서, 약 800여 세대에 대한 실태조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지리학과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는데 나의 임무는 그들이 사는 공간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의 면적과 시설, 환경 등을 건축 도면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꼼꼼히 기록하였는데 연탄 양동이 하나, 양말 한 켤레도 모두 기록에 담았다. 그리고 끝으로 왜 구룡마을에 살게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간략하게 인터뷰를 통해 구술사도 진행하였다. 이 일은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악취가 나던 도랑, 더위와 추위를 피할데가 없던 길, 제대로된 화장실 조차 없었던 환경에 가기 전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의 내적 갈등을 심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빈곤에 대하는 태도였다. 

     

     그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 비닐하우스에 나무 판재로 덧붙여 만든 것으로 화재나 장마, 소음에 극도로 취약했기에 적절한 임대주택이 주어지면 그들은 무척 반길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사는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경이 좋을테니까. 하지만 불법으로 전입해서 입주권을 얻으려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원거주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들은 임대주택의 임대료조차 감당하기 버거웠기에 마을의 열악한 환경도 그들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여기곤 있었지만 그것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를테면 ‘가난한게 뭐 어때서?’ 같은 입장이었다. 마을 중앙에 모여 즐겁게 수다도 떨고 다니는 우리에게 음료수도 건네는 그들을 보면서 빈곤이라는게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게 하였다. 하루 세끼 못 먹으면 빈곤한 것인가? 돈이 별로 없는 게 정말 빈곤한 것인가? 오히려 그들을 정말 빈곤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판단 기준이 아닌가? 철학적 관점을 떠나 우리가 설정한 잣대 자체가 그들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상대적인 빈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내가 조시한 기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한 빈곤 가족의 생애를 담은 책이다. 사회학자 조은 교수는 25년의 시간 동안 사당동이라는 빈민촌이자 철거예정지역에 살고 있었던 한 가족의 생애사를 기록하고 이를 연구한 작업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참여 연구라는 조사방법을 통해 사당동에서 가족들을 알게 된 과정에서부터 상계동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녀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사는 모습까지 꼼꼼히 조사하고 기록되었다. 나의 짧은 경험들을 반추해 보면서 크게 두 가지 물음과 고민이 일었다. 먼저 ‘금선할머니와 가족’이 갖는 개별성과 연구자들이 시행했던 다양한 조사방법에 대한 객관성의 물음, 두번째는 연구자(혹은 우리)들의 빈곤에 대한 관점과 자세, 태도에 관한 고민이 그것이다. 

     

     

    25년이 만들어낸 드라마, 그 명과 암

     먼저 저자와 그 연구원들은 연구 대상으로 금선할머니 가족을 선정하였다. 책에서는 이유로 크게 4가지 꼽았다.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어 주거의 해결이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케이스였고 손주들이 많아 대를 걸쳐 가난의 대물림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금선할머니의 성격이 좋아 구술을 진행하기 용이했고 현장 조교가 1년 이상 형성해 둔 라포 덕분에 관계를 맺고 연구를 진행하기 수월하다는 점이 있었다. 책에서는 초기에 10가구 내외의 조사 대상이 이와 같은 이유로 점차 좁혀져 금선할머니로 선정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그 선정 과정의 객관성에는 아직 의문이 남는다. 그들이 과연 사당동 빈민들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가? 혹여나 연구의 용이함과 편리성, 또는 연구자와의 친밀함으로 인해 금선할머니가 선정된 것은 아닌지? 워낙 상황이 복잡하고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기 때문에 연구에 협조적인 대상을 찾는 것만으로 선정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이해는 하면서도, 지나치게 한 가족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자칫 역으로 다른 빈민들을 배제시키는 문제를 낳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면서 연구방법도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처음에는 문화기술지라는 방식으로 서면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을 중점적으로 행해졌으나 그 이후는 영상 문화기술지라고 하여 일종의 다큐멘터리 촬영의 방식을 병행하여 그들의 삶을 기록하였다. 중간에는 HPT 테스트라고 해서 미술 치료 프로그램으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기술을 담당하는 매체가 달라졌을 뿐 언제나 객관과 재현의 경계를 넘나들며 연구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연구자는 과연 정말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가? 혹은 연구자의 해석이나 편집을 통해 사후적 판단이 개입되지는 않는가?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기존의 질적 연구 방법론의 지침을 상당 부분 어기거나 넘어설 수 밖에 없었다…문자 매체 뿐 아니라 영상 매체를 활용한 질적 방법의 도입은 질적 방법론의 교과서적 원칙들을 때로 배반할 수 밖에 없었다. 질적 연구 방법을 실험하는 현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35) 

     

     물론 저자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다양한 연구방법의 실험하는 장의 성격도 아울러 갖고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이것은 질적 연구 방법의 공통적인 한계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연구대상이 연구자의 ‘목적’이 담겨야 하기에 조사대상의 협조가능성이 연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현장의 불확실성도 중요한 변수이다. 블록조의 집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흙벽돌 집이라던지(p.64), 길이 점차 위험해져 연구원들을 철수해야 할 뻔했다던지(p.145)한 일들은 구체적이고 완결성 있는 연구계획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변경할 수 있는 가변적인 연구설계가 필요성을 요구한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매뉴얼대로만 진행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구자의 ‘중립성’은 연구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숙제다.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이미 예상된 문제였다. 주민들 속에서 연구를 수행하는데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입장에서 연구자가 지키는 ‘중립성’은 문제적일 수 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은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었다… (p73) 

     

     하지만 현장의 즉흥적 상황과 연구의 객관성을 상실해 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저자는 영상 문화기술지를 도입하면서 질적연구방법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익명성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도 영상적 진실과 기술지 간의 상충되는 부분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숙제처럼 남겨둔다고 하였다.(p.96) 저자가 연구를 수행하면서 느꼈던 내밀한 고충과 경험들을 토로한 것에는 깊이 공감이 가지만 한편으로는 그 숙제를 숙제로만 안고 가는 것에 아쉬움이 있다. 꼭 양적 방법이나 계량적 접근을 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생생한 현장감과 리얼리티를 획득하면서도 객관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이를테면 보다 다양한 가족을 동시에 추적해 비교사례를 만들어 준다든지, 도시 내 그들의 활동 범위를 통해 빈곤의 공간적,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는 등 사회학자의 시선 뿐 아니라 다른 학문의 관점을 중첩해서 배치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연구 목적과 발주처의 요구 사항 등 다양한 제약조건이 있었지만 긴 시간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인 만큼 도시 빈곤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삶과 사회적 시선을 아울러 담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려운 빈곤 연구의 과정들

     두번째로 빈곤에 대한 연구자의 관점과 태도이다. 저자는 빈곤에 대해 구조주의적 시선을 갖는다. 빈곤을 가져오는 문화적 요인보다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가 있는 것이며 가난은 가난 자체로 설명될 뿐이라고 하였다.(p.304) 나는 사회적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빈곤의 대물림과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해 동의를 하면서도 동시에 빈곤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대해서는 경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도시 속(특히 서울에서) 빈곤이 정말 문제인가? 문제라면 빈곤은 어떤 문제를 갖는가? 

     

     해외의 경우, 특히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계층이 섞여 있는 미국의 경우 도시 속 빈곤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곤 한다. 불법점거인 스쿼팅에서부터 반달리즘, 범죄, 살인, 마약 등 심각한 도시문제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많은 연구 결과 도시의 빈곤율과 관련이 있음이 연구 등을 통해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빈곤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 해외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사당동의 사례처럼 그 안에는 긍정적인 커뮤니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거주에 적합하지 않은 기반시설의 문제가 있을 뿐, 아이들이 노는 공간이나 일자리 소개 등의 유대 관계 등 실제로 매우 끈끈하고 건강한 사회적 연결망을 갖추고 있다. 내가 조사했던 구룡마을도 그랬다. 오히려 그들을 진짜 빈민으로 만드는 것은 삶이 열악하고 좋지 않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빈민으로 낙인 찍는 중산층의 시각이다. 위정자의 시선에서, 혹은 개발자의 시선에서 본 그들은 구원해 주어야 할 대상이자 한편으로는 몰아내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 상계동으로 이주하게 된 금선할머니 가족도 그러한 시선의 피해자이다. 빈곤의 본질적인 문제에 마주하지 않고 그저 빈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린 것과 가깝다. 

     

     미국의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가 1961년 멕시코의 빈곤지역을 연구하면서 처음 사용했다는 ‘빈곤 문화’라는 단어에도 책을 읽던 중 적잖이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러한 개념 아래 빈곤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들을 분류하고 사전적으로 정의내리는 것이 때로는 연구자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조교가 영주의 집에 갔을 때 자신의 ‘중산층’ 집과 다른 냄새를 맡았다며 이를 빈곤의 냄새로 정의하거나 어느 복지사가 왜 지원 받은 것으로 배달음식을 시켜먹는지 모르겠다며 이해할 수 없는 시선 등이 그러하다. 그들과 우리와의 표면적인 ‘다름’에만 주목하기 시작하면 “임대주택을 지원해 주면 되겠지”와 같은 1차원적인 해결책 밖에 내놓지 못한다. 임대주택의 지원이 빈곤문제의 해결로 이어지지 않아 ‘빈곤은 대물림된다’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왜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임대주택을 공급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에서부터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훨씬 더 풍부한 논점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시설의 공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도시의 빈곤 문제는 제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품고 가야 할 하나의 현상이고 보완해야 할 대상이 될 수 있다. 눈에서 지운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게 아니지 않는가. 

     

     

    빈곤을 받아들이는 자세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는 시각이지만, 나는 도시의 빈곤은 언제나 존재하며 결코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빈곤 계층에게 필요한 것은 빈곤과 빈곤이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의 폭을 넓이는 것이다. 숱한 화재가 나고 재난과 안전에 취약한 쪽방, 고시원, 반지하 등에 여전히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누군가에게는 그 공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등한시 한 채 위험하다는 이유로, 최저주거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철거하거나 이주를 강요하면 복지나 사회개선이라는 명목이 오히려 그들의 생존을 박탈하는 것과 같다. 정말 필요한 것은 그들이 단계적으로 밟고 올라갈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안전망들을 펼쳐 놓는 것이다. 덕주씨의 사례가 그랬다. 그는 매주 꾸준히 복권을 사는 사람이었지만 한번 200만원의 상금이 터진 이후로는 복권을 사지 않게 되었다. 그 돈이 종잣돈이 되어 보증금 500만원짜리 쪽방에 들어갔다가 이내 1000만원까지 불려 보증금 1000만원짜리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의 덕주씨가 가장 행복해 보였다는 저자의 말을 보며 이들이 필요한 것은 작은 시작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시작점에 세워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큰 도움이 된다. 몸이 아프거나 실패했을 때, 교육이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다. 세세한 시작점이 많아지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이렇게 될 때 설령 도시의 빈곤이 재생산된다 하더라도 그 빈도는 훨씬 줄어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빈곤 연구와 정책에는 여전히 빈곤에 고정적인 시선이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저소득층, 차상위계층 등 소득 수준에 따른 기준이 명확하게 있으며 그 기준을 벗어나는 순간 정책적으로 빈곤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네이버에 저소득층과 자격이라는 키워드만 넣어봐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자격 요건 여부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많은 경우, 그 정책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오히려 스스로를 빈곤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정책이 빈곤의 재생산에 일조하는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금선할머니와 가족들의 삶은 일원화된 정책 방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그 복잡성이 도리어 우리의 빈곤에 대한 태도와 연구,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빈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난 가난하지만 가난하다고 생각 안 해.”라던 구룡마을의 어느 할아버지의 말이 맴돈다. 분명 절대적인 빈곤은 언제나 있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함께 안고 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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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동 더하기 25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올해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직 정년을 맞은 사회학자 조은이 1986년에 사당동에서 처음 만난 한 가난한 가족을 25년 동안 따라다닌 연구와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 근대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도시빈민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빈곤을 겪어 보지 않은 사회학자가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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