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삶의 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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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게오르그 짐멜

     

    "근대 속 인간의 삶 그 자체"

     

    도시를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단면에 담긴 세상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 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2016)>이라는 책을 무척 좋아한다. 저자의 담담한 말투와 더불어 ‘단편적’이란 단어가 가지는 이중적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아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볍지만 무거운, 일상적이지만 비범한 생의 단면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의 큰 법칙이 아닌 무수한 단편들의 집합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보다 사소한 것들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관찰을 갖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또 한 명의 애정하는 사회학자가 될 것 같다. 당연히 짐멜의 존재에 대해 모른 것은 아니었고 풍문처럼 그의 사상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했었지만 그의 책을 정식으로 대면한 것은 부끄럽게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는지 큰 후회를 하게 할 정도로 감탄과 설렘을 주었다. 그의 생각들은 가볍지만 강력한 잽을 한방 한방 날리는 복서처럼 정확하고 날카로웠고 에세이처럼 생각이 흘러가는 글쓰기 방식은 때론 한 권의 잘 엮은 잡지를 읽은 느낌도 들게 하였다.

     

     이 책은 반드시 목차부터 훑어 보아야 하는데, 무슨 내용이 있을지 궁금한 단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돈, 유행, 장신구, 감각, 모험… 등이 그것이다. 흡사 <GQ>, <에스콰이어>같은 남성잡지에서 자주 접할 법한 보편적이면서도 다분히 대중적인 단어들이 탐구 대상이 된다는 것만으로 그의 관심사와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글들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서 함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떤 관점과 방법론으로 글을 전개 하는지 이해하는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옮긴이는 이 책의 끝에 짐멜의 간략한 생애와 좀 더 자세한 그의 사고체계에 대해 서술해 주었다. 

     

    …하지만 짐멜은 어떠한 경우에도 체계적으로 완결된 모더니티 이론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미완성의, 따라서 언제든지 개방되어 있는 모더니티 이론이다. 중요한 것은 현대 세계에 대한 보편타당한 일반 이론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구체적인 현상과 과정들이다. 현대 세계의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구조와 특성은 하나의 통일적인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구조와 특성에 의해서 담지되고 이를 담지하는 수많은 단편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짐멜은 여러 가지 인식의 틀과 수단에 의존해서 모더니티 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p.294)

     

    …그는 가장 작은 옆문들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는 일견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매우 이질적인 현상들에 힘입어서 현대 세계의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구조와 특징을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오늘날 모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고정적이며 실체적인 것이 상대적이고 관계적이고 유동적이며 단편적인 것으로 해체되었다고 보는 짐멜의 세계상이 반영되어 있다. (p. 296) 

     

     그는 모더니즘이 태동하는 시기에 살았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모더니티, 혹은 포스트모더니티의 범주를 초월했다. 그의 눈은 근대 속 인간의 삶 그 자체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바 미학적 방법(p.297)과 태도를 가지고 철학적 사유를 하는 그의 방법론은 나에게도 이해의 폭을 넓이는 단서가 되어 주었다. 관계성, 일상성, 특수성, 미시적 접근 등은 내가 주요하게 관심을 가지는 관점의 ‘틀’인데, 이런 것이 미학적 방법, 인식론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보편적인, 범신론적 통찰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근대적인 인간의 요건과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서 근대적인 인간의 생존방식은 무엇일까? 도시가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 가면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가면을 인정하고 추켜세우는 것이 인간관계의 미덕이 되었고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 되었다. 가면은 얼굴에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 손으로 직접 벗기는 것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 너머 무언가의 가치를 매기는 일, 타인을 평가하는 일, 스스로를 보여주는 일 모두 어떤 ‘것’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가면을 벗길 수 없다면, 우리의 주위를 둘러싼 것을 통해 그 너머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 단초를 저자는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가치의 계산적 환산

     지나치게 세속적인 소리일 수 있지만, 가끔 법원 앞 정의의 여신상의 손에 든 저울을 보고 있노라면 죄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 아닌 어느 정도의 돈으로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용도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도덕적 규율과 사회적 합의가 녹아 있는 ‘죄’라는 무형의 처벌을 유형의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 개인의 자유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돈의 양으로 죄질을 비교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돈이 곧 자유’라는 인식을 갖게 하기 충분하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일찍이 중세시대 이후 돈이 중간 매개체가 되어 한 사람의 인격과 토지의 밀착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인격성과 사물 간의 상호의존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이다.(p.12)

     

    …돈을 독립적인 상품으로 인식하는 사실이 그것이다…연결 고리가 심리학적으로 이 단계에서 단절되면 우리의 목적의식은 돈에서 멈추게 된다…수단이 목적에 의해서 압도되는 현상은 모든 고등 문화의 근본적인 특성이자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인간이 의도하는 것들은 점점 어렵고 복잡하게 되며, 또한 점차로 달성하기 힘들게 되기 때문에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된 수단과 도구들을 구축하고 이들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단계의 우회로를 필요로 한다… (p.24-25)

     

     즉, 돈이 어떤 관계의 중간에 서서 중재 및 매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 ‘돈’이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대상들을 가늠하고 계량하여 교환하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 여기에 돈이 지닌 의미의 핵심이 있다. 그 말은 돈을 통하면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사고 판다는 것에는 이같은 관계성이 숨어 있다. 돈을 통하면 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사람도 결속력을 갖게 해 준다. 돈만 있으면 모르는 어떤 사람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돈으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다. “너의 사랑이 이것 밖에 안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같은 표현의 근저에는 모두 돈으로 그 관계를 확인하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은 괴롭다. 그 괴로움은 단순히 의식주를 통한 생존을 못해서가 아니다. 한 인격을 둘러싼 관계의 장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돈으로 나타나는 표현이 그 관계를 약화시키기도, 강화시키기도 하는 상황으로 인해 점차 관계 자체가 진정한 목적에서 벗어나고 돈이 최종적인 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오히려 돈을 쫓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관계가 사용되기도 한다. 돈이 아닌 방법으로 관계성을 만드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거니와 저자가 지적했듯이 사회가 복잡해 질수록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얻기란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돈을 쫓는게 가장 쉬운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돈을 24시간, 365일 쫓을 수 있다. 돈은 어떤 순간에도 쫓을 수 있는 절대적 목표(p.27)가 되었고 그래서 삶에 휴식이 없어졌다.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 근면함을 요구하는 돈은 일종의 종교적 절대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돈이 다는 아니다. 얼마 전, 국내의 래퍼 도끼가 이와 관련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의 모친이 20년 전 지인에게서 빌린 돈에 천만원에 대하여 자신의 한달 밥값에 불과하다며 왜 그렇게 유난을 떠냐는 식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그 돈이 아무리 자신에게는 하찮더라도 과거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하고 마음을 다친 것에 대해 예의를 표현하는게 옳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저 돈의 절대적 수치만 비교할 줄 알았다. 돈이라는 것 안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진 못했다.   

     

    돈은 ‘비천’하다. 왜냐하면 돈은 모든 것에 대한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별적인 것만이 고귀하다. 다수가 동일하게 가진 것은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가장 높은 것은 가장 낮은 것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지는데, 이를 가르켜서 수평화의 비극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가장 높은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전락할 수 있지만, 낮은 것이 가장 높은 요소로 고양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들의 가장 고유한 가치는 가장 이질적인 것을 동일하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서 손상되며, 따라서 매우 특별하고 출중한 것을 가르켜 ‘돈으로 살 수 없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부유한 계층들에 특유한 ‘둔감함’은 단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심리학적 반향일 따름이다… (p.22) 

     

     그래서 돈은 이 시대의 거울과 같은 역할도 한다. 돈이 수많은 이 사회를 등가물로 치환하고 동일한 규제의 리듬을 가해 정신적, 문화적인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도 사실이다.(p.32) 그러나 동시에 돈도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물 중 하나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그 근원에 접근할수록, 우리 문화의 그늘 뿐 아니라 가장 우아하고 높은 수준의 측면이 화폐 경제와의 관계가 있음을 더 명백하게 드러낼 것(p.33)이라고 하였다. 돈의 이중성과 모순, 스스로 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를 하면서도 우울함을 떨칠 수가 없다. 현재는 치유되는 속도보다 상처가 더 빠른 속도로 커져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인 당시에는 아직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이 머물렀던 것일까. 현재는 돈이 치유의 문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문이자 동시에 열쇠처럼 느껴진다. 돈이 가진 치유의 효과는 결국 돈이 있는 자들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없을 때에만 그 가치는 의미가 있어진 현실이지만 그 또한 점차 돈이 잠식해 나가고 있다. 오히려 그것이 어려울 때, 돈은 그 사실을 정복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고 또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배타성을 만들 수 있다.결국 절대적 수량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 수량을 채우면 또 가지지 못한 것이 그 위에 있을 수 있으니.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의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인지도 모른다. 돈이 우리를 쫓아 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역으로 인간이 인간 답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계획의 본질

     근대적 삶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나는 우리가 모두 ‘계획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금 속해 있는 도시계획이나 건축계획과 같은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다. 농경 사회나 신분제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계획이란 그저 먹고 사는 하나의 패턴, 사이클에 불과했다. 한 인간의 인생은 반강제적으로 거의 정해져 있고 선대의 삶과 후대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계획은 오늘과 내일, 혹은 1년 단위와 같은 자연적 순환과 맞물려 있었으며 먼 미래에 대한 개념과 맞닿아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존의 문제가 더욱 급했으므로 동물적인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근대성이 시작된, 아니 그 이전의 2~3세기 전부터 계획하는 인간이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우리 모두는 계획을 일상화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교육을 행해졌으며 절대적 시간의 개념 등이 생겨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외모, 능력, 지위, 그리고 삶까지 계획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계획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심지어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도시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다.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사회, 그리고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과 생존 게임을 치러야 하는 도시공간에서 철저하게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언제 낙오될 지 모른다.

     

     현대의 삶에서 가장 심층적인 문제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립과 개성을 사회나 역사적 유산, 외적 문화 및 삶의 기술의 압도적인 힘들로부터 지켜내려는 요구에서 유래한다…어느 경우든 이 모든 것에는 동일한 근본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 다름 아닌 사회적, 기술적 매커니즘 속에서 평준화되고 소모되는 데 대한 개인의 반항이 그것이다.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p.37)

     

     결국 계획이란 것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너와 내가 달라야 하고, 이 건물은 저 건물과 달라야 하고, 이 도시는 저 도시와 달라야 한다. 우리는 ‘이미’ 라는 단어에 노이로제가 걸려 있다. 개인에게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그렇다. 이미 한번 쓴 것은 다시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새롭지 않으므로 아무런 자극도 줄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가치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계획’이다. 차이에는 상반된 속성이 공존하는 데 절대적인 다름과 상대적인 같음이 그것이다. 차이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름과 함께 일정한 유사성도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차이가 부각될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일률적인 시스템과 문화에 종속되면서도 언제나 개개인의 차이를 드러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자의적이기도 하고 타의적이기도 하다. 문제는 타의적일 때에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서 아주 정확한 표현을 하였는데 “현대 문화의 발전은 객관 정신이 주관 정신보다 우세하다” 라고 하였다.(p.50) 즉, 사회가 발전하는 속도—예를 들어 언어나 법률, 생산 기술이나 예술 등—가 각 인간 주체의 발전에 비해 너무 빠르기 때문에 개인들의 정신은 이를 따라잡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업이 늘어난 것에서 찾고 있다. 분업이 점차 일면적인 업무만 요구하고 있고 개인의 인격 전체를 위축시킨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점점 더 개별적인 전문성이 요구되고 언제나 스스로를 ‘팔기 위한’ 성과를 축적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고 하였다. 

     

    각 개인은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퇴출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도시의 삶은 생계를 위한 투쟁을 자연과의 투쟁으로부터 사람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공급자는 수요자 안에 언제나 새로운, 보다 독특한 욕구들을 불러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갈되지 않은 수입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찾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 시키지 않으면 안되고, 일반 대중의 욕구를 분화•세련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든다. 이로써 당연히 대중 내부에는 개별적 차이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p.49)

     

    점점 더 심화되는 개인의 차별성에 대한 내면적, 사회적 요구는 개인을 끊임없이 계획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일과 삶의 균형, 워라벨의 유행은 역설적으로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24시간 동안 일하는 느낌이 든다는 요즘 사회에서 여유라는 것은 정말 사치로 바뀌고 있다. 일과의 계획을 적어두는 플래너를 빽빽하게 채워두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오히려 계획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과 같다. 저자는 이러한 세태로 흘러갈 것을 알고 있었을까.

     

     

    보여지는 삶과 태도

     얼마 전 온라인에서 진정한 힙스터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보았다. 그 중 인상적인 문장은 “본인이 힙스터임을 아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힙스터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유행을 만들어 내는데 큰 기여를 하는 힙스터 집단에서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는 또 다른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옮겨가지 않으면 그는 선도그룹에서 도태된다. 항상 뱃머리 선장처럼 선도하는 소수와 이를 쫓는 다수의 양상. 이것이 유행의 사이클이자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좀 더 복잡하다. 유행을 따르고자 하는 심리와 그것에 거부하는 심리가 공존한다. 그것은 굉장히 감정적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스타일을 보면 그것에 마음에 불씨가 살아나 지름신이 강림하는 반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라가는 것을 보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는 거부감도 든다. 사람마다 그 강도의 스펙트럼이 다를 뿐, 어느 누구도 유행에 대해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미니멀 라이프도 이미 유행처럼 끓어 올랐다가 지금은 또 식지 않았던가. 

     

     유행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특징적이다. 유행은 한편으로 그것이 모방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의존 욕구를 충족시킨다. 다시 말해 유행은 개인을 누구나 다 가는 길로 안내한다. 다른 한편 유행은 차별화 욕구를 만족시킨다. 다시 말해 구분하고 변화하고 부각시키려는 경향을 만족시킨다. 이는 유행의 내용이 변화되면서 현재의 유행은 어제나 내일의 유행과 다른 개별적 특징을 갖게 된다는 사실 뿐 아니라, 유행이 언제나 계층적으로 분화한다는 사실에도 입각한다.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이다.  

     

     보다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이 같은 이중의 심리적인 특징들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여야하는지에 대한 선택과 이를 통한 만족감과 관련이 있다. 만약 내가 사회를 표상하는데서 보다 만족감을 느낀다면, 유행의 극단을 따를 것이다. 반대로 개체화, 개인성을 나타내고 싶으면 최대한 반대되는 속성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킬 것이다. 어느 곳으로 각자를 위치시키던 간에 그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관심종자의 줄임말인 ‘관종’ 이라는 단어가 유사한 심리적 표현일지 모른다. 그 강도는 다르겠지만 저자는 이를 사회적 충동과 개별적 충동의 독특한 평형관계라고 규정한다.

     

    모더니티에도 유행이 있을까

     

    유행은 내면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자립심이 없고 의존적이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고 눈에 띄고 싶어하는 개인에게 적합한 활동 무대가 된다. 유행은 하찮은 사람까지도 그 지위를 높여주는데, 이는 그가 유행을 따르는 한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개인은 전체 정신이 자신을 떠받친다고 생각하게 된다…겉으로 보기에 그는 공공의 취미를 극단적으로 대변하기 때문에 전체의 선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p.60)

     

    또한 이는 유행을 거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의식적으로 반모던하게 옷을 입거나 행동하는 사람이 개체화의 느낌을 갖는 것은 그의 독특한 자질 덕분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선례를 부정하는 행위덕분이다…사회적 모방을 역으로 수행하는 데 만족하며 동일한 특징을 지닌 긴밀한 집단에 의존함으로써 힘을 얻기 때문이다…(p.61)

     

     장신구의 사회적 의미도 마찬가지다. 유행도 때로는 일종의 허영심과도 연결되는데(p.73)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장신구이기 때문이다. 장신구는 예나 지금이나 비싸다. 여성의 경우는 말한 것도 없고 남성의 경우엔 특히 시계가 그런 위치를 점하고 있다. 24시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다니는 우리에게 가장 쓸모없는 것 중에 하나가 몇 천만원이 넘어가는 오토매틱 시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쓸모없음’ 때문에 최근에 와서 장신구적 지위로 격상되었다. 이른바 럭셔리를 상징하는 물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매우 극명하다. 소위 ‘짝퉁’을 차면 사실 안 차느니 못하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유사해도 진짜가 가지는 희소성, 거리두기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장신구가 지닌 고유한 광채, 그로 인해 사람들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것에 본질적 속성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다지 동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또한 자신을 보여지게 하는 포지셔닝에 가깝다. 똑같은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티파니의 박스 안에 들어가면 가격이 몇 배가 오르듯이 이미 장신구도 스스로의 지위와 취향을 드러내는 정점의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그 본래의 물건보다 그를 둘러싼 사회적 가치—이를 테면 브랜드의 파워나 사회적 영향력 등—가 더 중요하고 소비자는 그것에 반응한다. 많은 사람이 알아줄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행의 본질적 특성이다. 유행은 결국엔 없어질 수 있어야 유행으로서 의미가 있다. 클래식한 것, 어센틱authentic한 것은 꾸준히 사람들이 찾고 소비할 수는 있지만 유행이 될 수는 없다.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 영원한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유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유행이라는 것 자체는 영원성, 불멸성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행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개별적 유행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느껴진다.(p.65) 우리가 작년에 산 코트가 있음에도 왜 또 올해 다른 코트를 사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이다. 이 또한 결국 보여지는 심리의 작용 매커니즘이다. 작년의 옷은 날 뒤쳐져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삶을 향하여

     무언가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느낌을 꽤 오랫동안 경험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도시에서의 삶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쪼들리는 통장 잔고와 높아만 가는 집과 물건 가격을 보면서 가슴 어딘가가 답답하게 조여오는 느낌을 항상 받는다. 어떤 것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을 했어야 했나? 내가 획득한 것과 포기한 것을 꾸준히 저울질하며 쫓기듯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현재 이 시각에도 내 SNS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새로운 사진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나는 선별해서 좋아요를 누르고 또 좋아요를 받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교묘하고도 계획적으로 계산해서 올린다. 유행에 뒤쳐져 보이지 않지만 헤퍼보이긴 싫다. 서로가 그것이 온전한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한바탕 서로 좋아요 주고 받기 게임을 마친다. 나보다 더 좋은 곳에 가고 더 맛있는 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부럽고 우울해진다. 마음을 다시 추스리고 내일 해야 할 일들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잠에 빠져 든다. 

     

     이 책을 덮으며 저자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의 삶은 어땠냐고. 근대적 인간의 1.5세대 정도 되는 그는 어쩌면 지금 보다 훤씬 더 모더니티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을 것 같다. 물론 그래서 이런 저작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적 시선일 뿐이고 짐멜의 내적 갈등에 대해 더 궁금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와 같은, 아니 모든 현대인의 괴로움을 그도 알고 느끼고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향점은 있었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말이다. 개인, 인격체로써 목표로 할 수 있는 변하지 않을 절대적 목표. 그것을 간직하는게 어쩌면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미약하게나마 대항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글 중 저자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의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 데에 있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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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세밀함을 아우른 전방위 사상가 짐멜의 모더니티 탐구. 돈, 여행, 유행, 모험, 성, 종교, 편지, 얼굴, 장신구, 식사, 손잡이 등과 같이 일상적이고 일견 사소해 보이는 현상들을 철학의 진정한 대상으로 간주하며 이 대상들의 분석을 통해 짐멜만이 읽어내는 모더니티의 새로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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