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생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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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으로 세상 읽기 - 전상인

     

    "각 시대를 풍미했던 잔해들의 축적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인 을지로

     

    서울 중의 서울

     장충동의 동국대입구역 앞에는 오래된 빵집이 하나 있다. 대를 이어 살아남은, 서울 안에서는 꽤 유서있는 빵집인데 ‘과자 중의 과자’ 라는게 이 가게의 표어이다. 요새는 찾아보기 힘든 버터케이크나 사라다빵, 각종 쿠키가 진열대에 빼곡히 자리잡고 있고 옛날도너츠나 생크림빵 같은 기본적인 종류들도 매대 위에 가득히 채워져 있다. 요새 유행하는 아틀리에 베이커리들을 비웃듯이 온갖 빵이 수북히 쌓여 있고 북적이는 가게 속에서 사람들은 한아름씩 빵을 사들고 문 밖을 나선다. 솔직히 그리 대단한 맛은 아닌 듯 하지만 그 인파에 홀리듯 나도 빵을 몇 개씩 집어들곤 했다. 

     

     10여년 전, 지방에서 처음 올라와 경험한 서울은 그 빵집과 비슷했다. 다양한 빵의 이름처럼 유명한 지역과 장소, 사물들이 서울이라는 빵집 속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행정구역이나 역사적 공간 외에는 서울만의 뚜렷한 특징이나 맥락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어디서나 비슷한 ‘수북한’ 풍경의 일상 속에서 이곳이 저곳 같아 쉽게 길을 잃곤 했다. ‘왜 하필 여기, 이렇게?’ 라는 질문은 아이의 옹알이처럼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무슨 빵을 골라야 할지 몰라 빈 쟁반을 들고 서성이던 심정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운 서울 풍경의 진열 속에서 허전한 마음만 붙잡고 한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 어쩔 수 없이 그저 체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자체가 서울의 특징이자 서울의 모습을 관람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갑자기 커버려 손목과 발목이 옷 밖으로 나와버린 사춘기 소년처럼 서울은 너무 빨리 자랐고 아직도 성장 중이다. 각각의 장소와 공간들은 아직도 서로의 어깨를 부딪히고 있고 주변을 살피고 배려할 마음은 여전히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각각이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는지, 그 경쟁을 지켜보는게 굉장한 관전포인트이다. 오늘의 장소를 어떻게 내일의 건물이 꺾는지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콜로세움처럼 느껴진다. 검투사가 아니라 건축사들의 싸움터이다. 

     

     그 장충동 빵집의 슬로건처럼, 서울다운 ‘서울 중의 서울’은 우리에게 정말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언제나 공사 중”인 풍경이 한국의 모습이자 서울의 진짜 생김새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성취를 이룩해 내도 우리는 언제나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이 땅에 두 발을 꼭 딛고 살아갈 수 밖에 없기에 그 기반이 언제나 바뀌고 흔들린다면 우리의 생활 자체가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시시각각 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안정되고 지속성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추구한 경제적, 물리적 성취와 그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것 간에 경계의 불합치가 이 책이 주목하는 주요 관심사이다. 저자는 일종의 점, 선, 면으로 나누어 우리의 도시공간을 살펴보고 있다. 집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공간과 그 집과 장소들이 집합되어 있는 터,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길이라는 도시의 물리적인 근본 요소를 하나씩 조망하면서 각각의 요소들이 내재하고 있는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속성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들을 다양한 이론과 사례를 곁들이며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사실 궁극적으로 저자가 바라는 바는 아니겠지만, 이 책이 갖는 사회적 문제인식과 함의는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만큼 높아진다. 그리고 상당수의 독자들은 매 장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이 왜 이런 모양과 생김새를 가졌는지 그 이유와 문제에 대한 해답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하여 먼저 겪었던 무수한 끄덕임 중 일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써보려고 한다.  

     

     

     

    주거의 종말 또는 새로운 진화

     강남구 개포동 끝자락에는 서울의 마지막 남은 판자촌이라는 지위가 부여된 ‘구룡마을’이 있다. 그곳을 방문해서 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집이라는 기존 관념과 그 속의 풍경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이미지이고 환상인지 깨닫게 된다.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집에서, 화장실도 부엌도 온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은 그 집들 앞에서 이게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집’이라는 관념 자체가 흔들린다. 아파트를 필두로 한 기능적인 도시주거형태가 이미 너무나 보편적인 클리셰cliché로 받아들여지기에 동일한 도시에서 전혀 다른 주거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시각적 충격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집이 자신들의 진정한 집이다 감당할 수 없는 집은 그들에게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근대화와 더불어 그 이전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주거양식과 주거문화가 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 방들의 분화는 그것의 전조였고, 절대주의 바로크 시대에 선보인 과시적 공간의 배치는 그것의 징후였다…18-19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상류층의 주거공간은 점차 가족으로 단위화하는 경향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p.49-50)
    르 꼬르뷔지에의 아파트 개념은 20세기 주거공간의 보편적 모델이 되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과거 그 어느 시대에 비해 인류의 주거는 집합화되었고 고층화되었고 대량화되었다…현대사회의 주택은 주거전용이 원칙이며, 주거는 가족단위가 기본이다. 이와 같은 주거의 문명사적 트렌드와 가장 선택적 친화력이 높은 주거형태는 단연 아파트이다. (p.63,67)

     

     우리가 익히 경험하면서 너무나 익숙한 주거공간의 배치와 풍경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정립된 것이다. 당시 세계적인 도시를 비롯하여 우리사회가 겪은 많은 사회적, 환경적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주거 유형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바로 집합주택이었다. 기능은 최적화된 형태를 만들어 냈고 그 형태는 개별적인 삶을 압도했다. 비단 그것의 순수한 영혼은 1972년 미국에서 프루이트 아이고Pruitt Igoe를 마지막으로 사라졌지만(p.64) 대한민국에서는 점점 더 높아지고 다양해지며 흡사 위령비 같은 형태로 그 영혼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편,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실존은 스스로 집을 짓고, 그 속에서 직접 거주하면서 사색과 철학에 몰두할 때 가능”하다든지, 바슐라르의 “파리에는 집이 없다”(p.70)는 일침처럼 아파트 일색의 주거문화가 주체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는 부적격한 거주방식일지 모르지만 그 지적들이 사회의 변화상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저자가 밝혔듯이 철학적 비판의 날을 채 세우기도 전에 거주 방식이 빠르게 또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의 핵심적 구성요소인 방이 인류학적 중요성을 상실”한다든지, “집이 수행했던 다양한 역할이 이제 모두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p.76) 등 집이라는 공간의 기능적 중요성이 날로 떨어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모빌리티의 증가, 가족관계의 혁명적 변화, 가족규범의 와해와 개인화의 부상, 주택의 고가화로 들었다. 모두 일상적으로 직면하여 크든 작든 우리의 주거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아파트라는 단일한 주거 모델로는 해결할 수 없다. 상기 학자들의 언급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아파트가 변화하는 미래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은 무척 시급한 문제이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여전히 모두가 아파트를 원하며 마음은 아닐지라도 머리는 아파트를 향한다. 아파트 만이 언제나 승승장구하며 우리를 (경제적으로)구원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미래의 전망이 현재와 다르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미래에 주거공간 자체가 의미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저자도 이러한 현상이 주거의 종말로 이어질지에 대한 답은 열어놓았다. 오히려 읽는 독자에 따라서는 새로운 진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거주의 진정성도 시대정신과 개인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주거공간도 단일한 방향을 향해 달리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논리 앞에 일률적인 주거공간의 보급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어쩌면 거주성의 변화가 한세기를 풍미했던 주거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화 분기점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기억이 남은 장소

     건축가 승효상은 자신의 도시관을 ‘터무늬’에 비유하곤 했다. “터무니 없다”라는 용례를 터무늬에서 찾은 그는 각자의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도시조직urban fabric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정작 본인은 아파트에 거주한다며 비판도 받았지만, ‘터’로 대변할 수 있는 도시조직과 기존의 공간단위가 가지는 힘을 강조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저자도 비슷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터라는 개념을 장소로 해석하며 그 장소는 도시나 국가가 아닌 마을이라고 칭할 수 있는 공동체의 규모에서 훨씬 증대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도시의 최소 단위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발생형태와 도시와의 관계에 따라 미국 보스턴에서 출발한 어반빌리지urban village나 프랑스 파리의 카르티에quartier의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p.94-96). 성격은 다르지만 모두 도시와 도시를 구성할 수 있는 단위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단순히 하부 구조로서가 아닌 그 자체가 가진 문화나 기질, 정체성인 이른바 어반 테루아urban terroir(p.98)에 대한 강조를 덧붙인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특히 서울에서는 테루아와 같은 고유한 장소성이 숨쉬는 곳은 냉정히 말해 거의 없다. 애초에 지방의 이민자들로 구성된 서울에서 오랜시간 숙성되어 깊은 향과 맛을 내는 장소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세기 정도 안에 새롭게 만들어진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과 20-30년이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아파트나 대형 복합시설과 같은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낸다. 기존의 길과 땅의 형태, 지형을 말소해버리고 정해진 상가에 상업시설을 몰아넣고, 몇 개의 타입으로 구성된 주거공간에 일률적으로 살아가는 삶에서는 애초에 장소성이 발현되기에 불가능하다. 

     

     어느 한 트위터리언이 자조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21세기의 화전민에 비유한 적이 있다. 홍대에서 오래 장사를 하였던 그는 치솟는 임대료를 피해 상수동으로 옮겨갔다가 망원동을 거쳐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각 지역들을 힘들게 개척해두면 결국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작 본인은 수확(수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 다른 지역으로 등 떠 밀리듯이 가버리는 꼴이 마치 화전민과 같다는 것이었는데,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불을 지른 것 같이 망가지고 사라지는 동네를 바라보며 씁쓸해하는 그의 표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기억은 역사와 다르다. 만약 역사가 지배권력이 만든 공식 기억이라면, 장소의 자산으로 소중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적 역사로서의 미시적 기억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집단기억을 구성하며, 이는 사회공동체의 형성과 지속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p.146)
    요컨데 본질적으로 기억은 장소지향적이거나 최소한 장소기반적이다. 시각 위주의 근대 도시계획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공간의 생산에는 유능했지만 장소성의 보존에는 미숙했다는 사실이다. (p.147)

     

     도시 내 고유한 장소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저자가 말한듯이 기억의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도시라는 용기container 에 축적이 되는 것이고 연속적으로 누적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반이 되는 장소는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 안에 녹아 있는 수많은 일상적 내러티브narrative와 사람들과 관계된 집단적 기억들이 저장된 장소들을 너무나 쉽게 태워 버린다. 그것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말이다. 

     

     건강한 생활환경의 인프라, 골목으로 대변되는 미세한 도시조직은 그 장소성이 발현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물리적 환경이라는 것에 깊게 동의한다. 제인 제이콥스가 제시한 4가지(p.155)도 그 맥락과 같이 한다. 안타깝게도 서울은 매년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서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주름은 금새 지워져 새로운 피부를 이식하고 여드름이 날 찰나에 박피를 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젊은 서울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멀리서보면 온갖 흉터 투성이다. 

     

     

     

    속도 조절 장치로서의 길

     길과 관련하여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속도제한이다. 도심부는 주로 시속 60km, 고속도로는 시속 90-100km, 아우토반과 같은 특수한 도로는 무제한인 경우도 있다. 심지어 자전거 전용도로에도 속도제한이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안전을 위해서이지만 시속 60km가 시속 100km보다 항상 안전하다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때로는 그것이 (권력자의) 의도적인 속도 조절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서울에서 대전은 2시간, 부산은 5시간이라는 식의 관념적인 거리감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동장치에서의 물리적 위치도 도시를 경험하는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강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아예 도시와 유리되어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각종 간선도로를 이용할때면 도시의 풍경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 도로의 속도를 담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도시와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지점만 있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서울을 인식하는 것은 언뜻 언뜻 보이는 다리와 산과 같은 랜드마크적인 공간 뿐이다. 

     

    우리의 적절한 속도는 어느 정도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정치권력은 비정착 유목민을 가만두지 못한다. 국가가 “늘 ‘돌아다니는 서람들’의 적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길의 정치학’은 인간의 유목 본능과 권력의 통제 기획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p.171)
    철도의 보급 이후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의 기본 개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철도에 의한 공간의 수축이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게다가 기차 시간표는 사람들을 특정한 장소와 시점에 규범적으로 위치시키는 통치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주관적 혹은 체험된 시간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르페브르는 이를 시간이 “사회에 의해 죽었다”고 표현했다. (p.180)

     

    길은 우리의 영역을 확장시켜주지만 동시에 제약한다. 정해진 길로 다녀야하는 숙명은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물리적 특성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 따라서 도시에 어떤 길이 있고, 사람들이 길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에 따라 도시를 이용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풍경이 변한다. 길이 ‘그림일기figurative journal’로 불리는 이유(p.166)도 우리는 대부분 길 위에서 도시를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과 길을 둘러싼 공간이 매우 중요해질 수 밖에 없고 “길 앞에서 길을 못 보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라며 길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복잡계 물리학 교수인 제프리 웨스트의 명저 ‘스케일Scale’ 에서는 도시의 속도를 언급하며 주민이 수천 명에 불과한 소도시에서 100만 명이 넘는 도시로 가면 평균 보행속도가 시간당 6.5킬로미터로 거의 2배 빨라진다고 하였다. 실제로 서울을 걷다보면 주변의 속도에 맞추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서두르게 되고 더 나아가 여기에 적응하면 느릿하게 걷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로 방해가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이 책에서도 보행공간으로서 길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기계화된 이동의 반작용으로서 ‘거리의 마찰’, ‘소요peripatetic’라는 담론을 시작으로 르페브르가 거주권에 포함시킨 ‘보행권', 얀 겔의 ‘사람을 위한 도시’ 개념 등을 차례로 소개하며 걷는 공간으로서의 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울을 다시 돌아보면 좋은 길을 찾기가 어렵다. 6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 사람들의 걸음이 만들어 낸 길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은 언젠가 정비해야 할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뒤늦게 전국적 걷기 열풍에 힘입어 성곽둘레길을 홍보하고 각 수변공간을 정비하지만 이는 역으로 도심 내에서는 걸을 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는 꼴이 되기도 한다. 

     

     

    서울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이 책은 결코 서울의 공간에 대해 낙관적이진 않다. 오히려 "공간 후진국”이라는 별명을 거침없이 붙이며 날이 선 입장을 가지고 있다. 시중의 가볍고 이상적인 담론만 제공하는 관련 서적들과 확실한 선을 긋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현재의 서울이 만들어낸 ‘현실공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모 아니면 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문제는 개나 걸에도 걸쳐 있다. 그만큼 복잡하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우며,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믿음은 거의 미신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와 해결에 관한 연결고리에 대하여 성실하고 집요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트렌드에 따라 단기적으로 대응하기 바쁘다. 그래서 서울의 모습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트렌드 잔해들의 축적이라는 맥락에서는 굉장히 누적적이다.  모방이 넘쳐나고 대중적이며 충동적인, 한마디로 키치kitsch적인 풍경의 도시. 이것이 현재 서울의 모습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수준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사회적 행위에 목표와 전선이 없”고 “각자도생이 가속화되는 홉스주의적 상황 속에서도 국가는 푸코주의적 대응을 펼치는”(p.228)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런 혼란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강조한 것은 통찰력과 상상력이다. 흔들리지 않는 깊은 생각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점이고 이를 위해 발전 속도를 의도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도리어 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로서의 혁신일 수 있다. 언제나 젊어 보이려는 도시보다 멋지게 잘 늙은 도시가 더 자연스러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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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으로 세상 읽기

    '이 책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가 처한 경제부국과 공간빈국 사이의 극명한 대조다. 툭하면 선진국 진입을 떠들고 걸핏하면 OECD 회원국을 말하지만 막상 삶의 공간에 투영된 ‘근대화의 기적’은 아직도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언제나 공사 중’인 이 나라의 생활공간은 전쟁터 아니면 난장판이다. 내 평소 소신 가운데 하나는 일상의 공간만큼 선진국과 후진국을 정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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