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적 공간과 파리화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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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데이비드 하비

     

    "이 시대와 똑 닮은 18세기의 파리 이야기"

     

    21세기 : 파리의 어느 관광객

     8월의 무더운 여름날, 대학생 1학년인 나는 파리의 어느 이름 모를 관광객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유럽을 2주 동안 가게 되었고 그 중 3일을 파리에 머물렀다. 나에게 파리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세계는 파리지엥과 파리지엥이 아닌 사람으로 나뉜다고 했던가. 파리 외 도시의 모든 이에게 그렇듯이, 나에게도 다른 어떤 도시보다 감격스러운 방문이었다. 독일 칼스루헤에서 야간 기차를 타고 아침 7시에 파리 동역에 내렸고 바로 짐만 맡겨둔 채 씻지도 않고 파리를 활보했다. 루브르의 피라미드를 지나갔고, 미로 같은 오르셰를 들어갔으며 에펠탑의 밤낮을 보았고, 신개선문 아래에서 개선문을 바라보았다. 

     돈과 함께 철이 없던 나는 카페에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진 못했다. 대신 튈리르 공원을 비롯해서 길가다 있는 크고 작은 공원의 벤치에 털썩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파리를 즐기는 나의 방식이었다. 나는 턱이 빠질 것 같이 딱딱한 샌드위치를 주섬주섬 꺼내 먹으며 관광객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풍경은 바로 가로수들이었다. 쉼 없이 달리기를 해도 이상하지 널찍한 공간에 똑같이 생긴 나무들이 오차를 허용하지 않은 채 균등한 간격으로 심겨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앞과 뒤를 모두 볼 수 있었다. 하필 공원을 가로지르게 된 운 나쁜 보행자는 나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고 나는 관광객이라는 지위를 무기로 사람들의 모습과 움직임을 하나씩 음미했다. 파리의 여유로움, 일상 속  멋진 낭만에 나는 잠시나마 스며들 수  있었다.  

     겨우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어느덧 당도한 샹젤리제 거리에서 난 또 한번의 위화감을 느꼈다. 골목길에서 내려온 때문인지 그 한 눈에 쉽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쭉 뻗은 도로의 형상이 이상하게 낯설었고 여러 개의 종이 가방들을 손에 든 중국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돈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풍경에 나는 있을 곳을 잃어 버렸다. 길을 따라 투명하고 아름다운 명품 숍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나에겐 그저 한없이 불투명한 곳이었다. 낭만도 돈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았다. 자본화 된 공간의 폭력성을 느끼며 개선문까지 주뼛주뼛 걸어가 개선문을 배경으로 사진만 한 장 남겼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하비는 그 파리의 아름다움과 그 사이로 보이는 균열에 대해 현미경을 통해 바라 보듯이 아주 세세하게 분석했다. 그 시점은 지금의 파리가 만들어진 순간이다.  

     

    ‘근대성modernity의 신화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생각이다…나는 이러한 근대성 개념을 신화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철저한 단절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힘은 설득력이 강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지만, 정황적으로는 그런 힘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발생할 수도 없다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p.8-9)

     

    ‘전체적으로 보아 1848년 유럽, 특히 파리에서는 뭔가 아주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1848년에 터져 나온 폭발이 자기 몫을 다한 이후, 사고와 행위 두 방면 모두에서 진정한 단절이 있었다…’ (p.9,20)

     

     근대성, 모더니티라고 하는 특질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배경인 파리를 무대로 삼아, 저자는 기존의 정형화된 틀의 시각을 비판하는 동시에 당시의 파리 생활의 미시사를 보듯이 파리를 다면체처럼 각각의 면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특히 제2장에서는 파리를 강력하게 개조하였던 오스망의 행보와 그의 계획을 둘러싼 역학들을 함께 조망하고 파리가 대도시로 성장하는 그 과정을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삶과 태도까지 보여 준다. 

     내가 3일 동안 경험한 파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파리는 다른 유럽의 작은 도시들과 사뭇 달랐다.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웠다. 다른 작은 도시들은 그 도시를 손에 잡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파리에서는 이 도시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였다. 눈과 신체는 공원의 여유로움, 센느강 다리들의 아름다움, 각종 기념비와 가로등이 주는 스펙타클이 주는 낭만성에 흠뻑 취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면에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을 것 같은 감각에 오싹했다. 표면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진짜 파리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오래 산다면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이런 것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진정한 면면일까? 

     

    19세기 : 파리의 어느 계획가

     1853년 6월, 파리의 총괄 계획가로 임명된 오스망이라는 자가 개선문을 지그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생시몽주의자에 가까웠던 그의 눈에 파리는 엄청난 개조를 해야 할 장이자 전쟁터였다. 그의 손에는 보이지 않는 매스가 들려 있었다. 제국이 선포되기 전 파리의 혼란을 몸소 느꼈던 그는 파리의 힘과 한계, 잠재력을 동시에 인지하고 있었다.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지만 그는 파리가 더욱 강대해지려면 일종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변화를 자신의 계획과 손으로 이루겠다는 정력과 야심이 가득했다. 일종의 마키아벨리적 사고, 다시 말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야심적이고 권력에 매혹당한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헌신(공공 봉사라는 것에 대한 아주 독특한 견해를 포함하여)했으며,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믿기 힘들 정도로 정력적이고 조직적이었고 관찰력이 대단하여 세부까지도 잘 포착했으며,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조롱하고 권위(심지어 황제의 권력까지도)를 뒤엎을 준비를 갖춘 사람이었다… (p.149)     

     

     당시의 파리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가 가진 자본의 잉여가 발생했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력도 과잉이었다. 적절하게 그것들을 소진할 필요가 있었다. 파리의 외적 환경—철도 건설과 같은—이 변화하는 것을 간파한 오스망은 소진할 수단을 ‘건조 환경’에서 찾았다. 불과 30여 년 만에 기찻길을 몇 배 이상 확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파리가 그 기찻길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의미는 싱크대의 배수구처럼 자본과 인구를 함께 빨아들인다는 것을 뜻했다. 외부적 공간관계의 변형은 파리 자체의 내부 공간을 합리화해야 하는 압력을 받았고 황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스망은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엄청난 공공사업계획으로 흡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일련의 공간적 틀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오스망은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있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추구했다…이러한 도시공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때문에 오스망은 대도시 지역 내 공간 질서의 합리적 진화를 위협하는 불균등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던 근교를 병합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60년에 그는 끝내 승리했다… (p.165)

     

     그의 눈에는 파리는 모든게 정체된 것처럼 보였다. 파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원활한 흐름’이었다. 물자간 흐름, 자본의 흐름, 사람의 흐름, 그리고 공기의 흐름까지 그는 도시의 숨통이 활짝 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조환경의 요소는 역시 도로와 주택이었다. 밍기적거리며 소심하게 계획했던 전대 계획가들과 달리 오스망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폭동에 대한 우려와 옛 로마 시대의 스페터클이 혼재했지만 이를 일치된 방법론으로 나아갔다. 도로는 순식간에 몇 배로 넓어졌고, 중심공간과 연결되었으며 직선화되었다. 

     주택 또한 계획을 꾸준히 밀고 나갈 좋은 매개체였다. 주택은 낙후되었고 끊임없이 각 지방에서 밀려드는 노동자들 덕분에 늘 부족했다. 오스망은 오래된 주택의 철거와 새로운 주택의 건설로 자본차익을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사업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페레르 형제의 조직 아래, 만들어진 크레디 퐁시에Credit Foncier는 일종의 부동산 전용 담보은행이었다. 낙후된 주택과 지역들이 사업의 추진제였다면, 크레디 퐁시에와 기타 금융회사들은 로켓 조종사였다. 만연해진 투기세력과 함께 자금의 유동성이 막히며 추락하기 직전까지 오스망의 지시 아래,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나아갔다. 

     

    …실제로, 금융이 조금이라도 재편되지 않았다면 애당초 그처럼 빠른 속도로 변형이 진행될 수 없었다. 단지 도시가 돈을 빌려야 했다는 것뿐 아니라 오스망의 기획 자체가 그가 열어젖힐 공간을 개발하고 건설하고 소유하고 관리할 재정적 힘을 가진 회사의 존재에 기대었던 것이다…(p.178)

     

    …(개발업자들도) 임대에 투자하기보다는 점점 더 상승하는 지가와 부동산 가치에서 투자 수익을 얻을 방법을 찾았다. 개발업자와 최종 소유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지대와 자산 가격의 수준과 유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과잉축적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적자재정을 통해 자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한 국가 기구가 결국은 이권을 장악하는 화폐 자본의 순환에 내포된 아슬아슬한 모순의 제물이 되고 만다…(p.201,212)

     

     70년대 서울의 불도저 김현옥 시장에게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오스망이라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현옥은 오스망의 반만 알았으니, 그래서 불명예스럽게 시장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계획적 시선에서 본다면, 오스망은 진정한 계획가였다. 오스망에게는 디테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는 가스등, 가판대, 심지어 소변기까지 거리의 장식 디자인까지 꼼꼼하게 검토했다.(p.150) 세느 강의 술리 다리를 국지적인 대칭이 아니라 도시적 규모에서 대칭이 될 수 있도록 수정을 지시한 사례는 대표적인 일화이다. 김현옥은 이런 부분을 배웠어야 했다. 

    오스망은 파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원활한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1870년, 17년 동안의 파리지사에서 해임되면서 그는 개선문을 둘러싸고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새로운 도로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파리는 진행중이었다. 그가 시동을 건 계획은 멈출 수 없어서 그 후 30년 동안 꾸준히 지속되었다.(p.151) 그는 상∙하수도, 공원을 적극적으로 계획했고 백화점과 파사쥬passage 같은 상업공간도 만들었다. 여기엔 공간과 자본의 결합되면서 일상의 소비문화를 바꾸었다. 돈이 있으면 장인을 거치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돈이 없더라도 구경을 즐길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자본이라는 손바닥 아래, 재편성된 공간을 비교적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파리는 제공해 주었다. 오스망이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그의 계획 덕분에 파리는 궁극적으로 명실상부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19세기 : 파리의 어느 노동자

     그는 파리 북쪽의 어느 시골에서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1858년 경, 더 이상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이 와해되기 시작할 무렵,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파리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장인이 아니었기에 특정한 노동조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파리가 필요한 인재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 그는 나무를 다룰 줄 알았다. 몇개월 만에 신속히 기술을 터득한 그는 공공사업 중 주택을 짓는 일에 투입되었다. 특정한 기술이 없던 다른 일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에 맞게 기술을 배우는 것을 보았다. 분업된 일의 프로세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우선 이주자들이 파리에서 얻은 직업은 그들이 원래 가졌던 기술과 거의 아무 상관이 없었다…기술을 가진 노동력이 계속 부족하다는 사실은 파리 산업에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했다…기술은 없지만 적응력은 있는 이주자가 대량 유입됨으로써 파리 산업에 온갖 기회가 생겼다…기술 없는 대규모 이주자들은 수공업 노동자들의 변형을 통해 달성된 것과는 아주 다른 산업 자본주의 방식을 통해 사회화 과정을 거쳤다. (p.262-263) 

     

     그렇다고 해서 생활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거의 생존할 만큼의 적은 돈과 살인적인 주거비는 그들의 삶을 핍박했다. 태어난 자녀들은 시골로 보냈는데, 높은 사망률을 고려하면 거의 죽이기 위해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p.282) 높은 임대료와 열악한 주거 품질은 부르주아들도 문제점으로 인식했지만 사정이 나아지긴 힘들었다.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우면서도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사이 그는 중개인의 소개로 교외의 어느 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68년 이후, 파리에서는 노동자들의 교육 문제가 중요함을 깨닫고 공립교육의 원칙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교육의 분포에 따라 도시의 사회적 공간 격리가 더 촉발되게 되었고, (p.294) 한편으로는 가정 내부에서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여성 교육이 주된 초점이 잡히게 된 계기는 여성이 교육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도 그의 1/3밖에 되지 않는 봉급을 받으면서도 부단히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이런 부분에서 그녀는 그와 싸움이 잦았다. 그는 “더 많이 벌수록, 더 적게 배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p.295) 생존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운이 좋게도 조금씩 소득이 높아졌다. 나름대로 스스로를 중산계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소득이 없을 때 있었던 분노와 변혁에 대한 열망은 소득이 늘어날수록 사그라들었다. 대신 소비에 대한 열정이 점차 커져갔다. 그들은 탕플 대로를 자주 들락날락했지만 샹젤리제와 같은 곳은 소비만 가능하다면 계급의 차이는 무시된 채, 동등해질 수 있었다. 그 쾌감이 그들의 내면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카페나 술집에서 같은 계급끼리 연대감을 느꼈다면, (p.318) 시간이 흐를수록 상품이 제공하는 스펙터클, 즐거움이 그것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오로지 돈, 화폐 공동체 만이 살아남았고 다른 사회적 연대를 꾀하는 공동체들은 고사했다. 

     

    …대로는 상품의 물신숭배주의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지배하는 공공장소가 되었다…상업적이고 공적인 공간과 소비를 통한 그 공간들의 사적 전유 사이의 공생관계가 아주 중요해졌다. 상품이라는 구경거리가 공/사의 구분선을 넘어 지배하게 되고 그 둘을 사실상 통합하게 된 것이다…대로를 산책하고, 쇼윈도를 구경하며 구매하고 공적 공간에서 과시하는 것이 유행에 필요한 것이 되었다…(p.310-311)

     

    …그 불안감은 부분적으로 생산에 의거한 관계보다는 소비와 외관에 근거하는 새로운 계급 차별 감각이 등장했음을 반영한다…이제는 가면이 실제 모습보다 더 중요해진다…대중적 페르소나는 개인들이 스펙터클의 운반자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참여자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운반하는가가 중요하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p.316-317)

     

     그래서 대로가 새로운 의미로서의 공공장소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이 모여 데모나 혁명을 꾀하던 그런 ‘불길한’ 장소가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스스로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대로라는 것에는 물건과 사람의 이동 외에 사람들의 ‘외향성’이라는 공간적 속성이 추가된 것이다. 마치 극장이나 스테이지처럼, 그들은 스스로를 대로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동시에 모두를 위한 관객이기도 했다. 중심과 외연을 함께 가진다는 점에서 저마다의 가면을 쓰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이상 그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게 그는 파리라는 메트로폴리스의 일원이 되었다. 

     

    다시 21세기 : 서울의 어느 거주자

     파리를 다녀온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제 나에겐 샹젤리제에서 겪은 위화감 따윈 찾을 수가 없다. 서울은 돈만 있으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했던가, 가난했던 그 시절에 비하면 그럭저럭 먹고 살만해졌고 이제 백화점 명품관에 가도 기죽지 않을 용기 정도는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돈을 쓰는게 즐거운 사람이 되었다. 비싼 옷은 아니더라도 비싼 케이크 하나 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유니클로에 가서 손에 잡히는대로 옷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서울에는 지하철 역이 3개만 겹쳐도 엄청나게 커다란 쇼핑몰이 생기고 각 지역 별로도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것들 투성이다. 차가 밀리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3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도로도 갖췄다. 서울은 반 세기만에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꿀리지 않을 대도시,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게 되는 점은 바로 파리가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이 시대와 똑 닮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50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무색하게 지금의 서울과 나의 경험을 그것과 비교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더니티의 수도’라는 책의 제목은 너무나 적절하다. 파리는 그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래서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이라는 본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라는 운영체제를 탑재했을 때, 공식처럼 그 도시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근대성의 세계화라는 통시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모두 파리가 만들어낸 후예들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표현이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파리화’된 사람들이고 우리의 공간은 모두 ‘파리적’인 공간들이다. 겉 모습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말이다. 그 너머의 대도시에 대한 상상력, 만약 그것을 우리가 해낼 수 있다면 서울은 또 다른 의미로서 새로운 수도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상상도 함께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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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는 자신의 `시공간론`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화의 도시 파리를 탐구한다. 파리를 대상으로 삼아 그가 이제껏 천착해왔던 자본이 지리공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 지리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의 그의 저작 가운데 프랑스의-또는 유럽사의-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역작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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