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시들의 오래된 자기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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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2 일상생활의 구조 — 페르낭 브로델

     

    “도시는 언제나 도시이다.”

     

    도시의 탄생과 성장

     우리의 대부분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정작 도시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근원적으로 왜 우리는 '하필' 도시에서 살고 있는가. 산악인 조지 말로리의 말마따나 단순히 ‘도시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Because it(city) is there’ 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바글거리며 살아간다. 분명 그 선택에는 분명히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근원적인 이유가 있을테다. 그리고 그 근원의 지분 상당분은 도시 자체에 있다. 잠시 시간을 거꾸로 돌려 보자. 도시가 갑자기 늘어난, 이른바 도시 빅뱅의 순간으로 말이다. 도시의 탄생 그 시점에서는 이게 도시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저 가스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막 도시의 형태를 띄고 있는 곳도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빨리 도시의 규모를 형성하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나 거대해져 버린 메트로폴리스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 최초의 순간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그 최초의 순간을 상상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만약 여러 도시들이 자신이 성장해 온 내용들의 특징을 담아 자기소개서를 썼다면, 저자는 인사담당관인 마냥 그 내용들을 잘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도시가 어떻게 자라며 변화해 왔는지 제3자의 시선으로 상세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특히 내용을 뒷받침할 충실한 자료들과 함께 각 도시들의 형성과 특징들을 비평어린 시선으로 절묘하게 담아 냈다. 게다가 번역자 주경철 교수의 정성스러운 번역과 주석들은 읽는 이의 이해의 폭을 훨씬 넓힌다. 종국에는 도시가 가져야 할 속성들이 무엇인지 저자가 밝힌 것 외에 하나씩 손으로 세어보는 것도 책을 즐기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도시인지, 아닌지 : 공간 속 권력관계

     현재 한국에서는 인구 5만명이 넘으면 지방자치법에 따라 군에서 시로 승격된다. 그러나 그것은 행정상의 구분일 뿐 사실 5만명이라는 수치가 도시의 경계를 증명할 순 없다. 도시의 정의에 대한 논의는 폐곡선과 같은 것이어서 끊임없는 상호관계의 작용과 보완, 그리고 그 합으로 인해 도시라는 지위가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의 절대적인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18세기 니에브르 현의 바르지라는 도시는 인구가 고작 2천명이었지만 분명 도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이유는 바로 주변 지역과의 권력관계에서의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착취-피착취 관계에서 얼마나 우위에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관계가 얼마나 확고한지에 따라 도시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도시가 도시로서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보다 열등한 생활을 하는 지역을 앞에 놓고서만이 가능한 것이다…부분적으로라도 시골 생활을 거느리는 것…도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작더라도 자신의 제국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p.669)

     

    …모래시계는 다시 뒤집어지기도 한다. 도시가 시골을 도시화하기도 하지만 시골이 도시를 시골화하기도 하는 것이다…아주 최근까지도 모든 도시들은 쉽게 손닿는 가까운 곳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했다…시골이 도시를 지탱해주어야 한다. 대규모 무역은 단지 예외적으로만 도시를 먹여살릴 수 있을 뿐이다. (p.707)

     

     그래서 농사를 짓는 곳이 시골이 아니라 어느 한 공간이 다른 공간을 얼마나 빼앗을 수 있는지, 반대로 어느 공간이 다른 공간을 얼마나 받들 수 있는지, 그 규모와 강도에 따라서 도시와 시골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초기에 시골과 도시의 간극이 크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하다. 추수 때 도시의 장인들이 자신의 일과 집을 내버려두고 밭일을 했다든지, 포도 수확기에 성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포도를 수확했다는 사례들은 그 경계의 모호함을 여실히 보여 준다.

     맥락은 다르지만 서울에 상경한 지방민 1세대 혹은 1.5세대들도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다. 사실 상경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오지 않았다.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왔지만 서울에 다다른 순간 본인들은 시골에서 왔다고 느낀다. 서울의 권력적 우위가 너무나 커 서울을 제외한 곳은 모두 시골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의 어느 한 부분은 지방에 남겨두어 언제나 다시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기며 서울에 소심하게 저항하거나 또는 모든 것을 받쳐 서울에 충성을 다한다. 지방에 놓여있는 끈이 끊어져야 비로소 완전히 도시에 편입되는 것이다.  

     

    도시적 정체성 : 경계 만들기

     그런 점에서 도시 입장에서는 도시민들의 '도시화'가 매우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민들이 얼마나 도시적 정체성과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으로부터 도시의 자의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창기 도시들은 공간의 독립적인 인식을 확연히 하기 위해 도시-시골의 공간의 관계 짓기 뿐 아니라 자체적인 경계를 긋는데 굉장히 노력했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인 경우—특히 서유럽—에는 대게 성벽으로 그 경계를 만들어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출간된 사전에서 도시를 “꽤 많은 사람들이 통상 성벽으로 둘러막은 곳에서 모여사는 지역”(p.717)이라고 규정할 정도이니, 대부분의 도시라고 칭하는 곳에서는 성벽을 둘렀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보호물이요 동시에 한계이자 경계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시들은 확대되면서 일부 외곽지역들을 포함하고 그것을 변형시켰으며 한편으로는 순수한 도시 생활에서 낯선 활동들을 더욱 멀리 외곽지역으로 밀어냈다.(p.720)

     

     문제는 그 직경과 형태에 따른 기능이다. 성벽은 외부와의 공격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지만 평화가 있는 시기에는 오히려 도시민들을 내려다 보며 감시하는 장치로 작동했다.(p.719) 더욱이 도시의 성장을 물리적으로 제약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뻗어나갈 수 없으니 10층 가까이로 높게 올라가는 건물이 생겨났다.(p.724) 하지만 대부분 평지에 위치했던 서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밀도가 높아지면 그 옆으로 새로운 해자를 파고 새로운 성벽을 세웠다. 마치 세포분열을 하듯이 새로운 지역은 다시 오래된 지역으로 편입되고 새로운 지역이 또 생겨나면서 수평적으로 덧붙여졌다. 

     

    부르그(Brug)의 어원은 성벽을 뜻이 있지만 독일에서는 도시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런 도시의 경계 만들기는 저자가 말한 서유럽 도시 형태의 발달과정에도 나타난다. 개방 도시(A)에서부터 닫힌 도시(B), 종속 도시(C)순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는데, 도시와 주변 시골의 수평적인 관계(로마시대의 도시)가 점차 폐쇄적이면서 독립적인 공간(중세시대)으로 변하다가 도시 내 강화된 특정 권력층(이를테면 국왕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는 방향이다.(p.751) 이는 도시 안에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계기와도 일치하여 도시민이라도 ‘진짜’ 도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외적 경계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외부와의 경계면은 사라지고 내적 경계가 대두되는 현상, 이것이 도시의 경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이슬람 도시들의 동심원 구조처럼 도시 내의 권력과 계층구조는 도시 공간과도 연계되어 도시 내에서 경제적, 심리적 경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는 도시와 도시민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우리 도시들을 상상하면 된다. 성벽도, 해자도 없는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도시이지만 도리어 선택의 폭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해 더욱 그 경계는 세분해 형성되어 있다. 경계는 게임 속 스테이지처럼, 자산의 규모가 기준을 넘을 때마다 입장권이 주어진다. 그렇게 도시는 그 안에서도 또 다른 도시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도시의 정체성은 점점 자아분열적 상태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시화의 물줄기 : 분업화와 시장

     아마존의 숨겨진 부족을 발견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방송 화면 안에서 난데없이 빨간 코카콜라가 적힌 낡은 티을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원주민을 볼 때가 있다. 어떤 시장에서 구입(교환)해서 입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티셔츠는 어떤 도시에서부터 흘러 흘러 원주민의 손까지 간 것은 분명하다. 도시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깊은 오지라 하더라도 시장의 영향권 안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은 찾기가 거의 어렵다. 자급자족이란 단어는 이제 거의 유물과도 같은 단어가 되어 버렸고 오히려 일상 속 취미생활 같은 뉘앙스에 가깝다. 

     

    …이렇게 운동을 관장하는 기능, 즉 도시 시장은 이곳이 도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요소였다…모든 도시는 무엇보다도 우선 시장인 것이다. 사장이 없는 도시는 생각할 수 없다…사실 모든 도시는 땅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속에 뿌리내리고 자양분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p.730)

     

    서유럽에서 자본주의와 도시는 그 근저에서는 같은 것이었다…”태어나는 자본주의”는 중세 도시의 틀을 깨뜨렸으나, 결국 국가와 연결되었다. 국가는 도시를 이긴 승자이면서도 도시의 제도와 심성의 계승자였으며, 또 도시 없이는 지낼 수 없었다.(p.749)

     

     서로가 만든 물건과 지식이 교환되고 소비되는 시장이 없다면 우리는 이제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시장에 깊이 종속되어 버렸고 시장의 눈치를 보면서 전달되는 무언의 말에 충실히 따른다. 그 시장 질서 속에서 우리는 다소간의 불만을 느끼면서도 대체로 군말없이 따르는 것은 이미 우리 내면에 그 언어와 심성이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광화문 교보문고의 자기계발 신간 코너에만 가보라. 그 흔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언급한 행운fortuna, 운명ventura, 이성ragione, 신중prudenza, 안전sicurta과 같은 단어(p.749)는 21세기 현재에도 그대로 사용되며 책의 제목과 소개글을 이룬다. 이를 통해 도시와 자본주의의 근대적 속성들이 얼마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재생산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혹시나 한 권을 훌쩍 꺼내들어 읽어 봐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이미 우리가 태생부터 학습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분업화가 전제이기에 필연적으로 각기 다른 특성(특히 상품)의 공간을 요구한다. 작가가 높이 산 루돌프 헤프케의 ‘도시 열도’ 라는 단어는 굉장히 적절한 표현이다. 큰 도시들과 중소도시들 간의 관계는 교환의 속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분업화의 뚜렷한 시각적 증거이기도 하다. 중소도시는 대도시 사이의 거점으로 스스로를 위치시켰고, 일종의 이동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며 살아가는 전략을 취했다. 현재 지방도시의 소멸과정은 인구 감소가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점차 빨라진 이동 속도에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적 거리가 압축 됨에 따라 대도시 간의 거리가 과거에 비해 훨씬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미 1782년 프랑스에서는 쓰임새가 사라진 2,3급의 도시가 사라지고 그 인구가 수도로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도시도 분업화된 공간들의 합집합으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는 메가시티는 그 자체로 국가와 같은 역할을 하며 공간 내에 수많은 분절된 공간들을 품는다. 서울에서 강남과 도성 안을 빼면 다 시골이라며 냉소와 자조가 뒤섞인 어느 지인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도 부산 출신이면서, 서울에서 또 다른 시골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쉬이 반박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말 뜻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각자도 각자의 삶과 생존을 위해 분업화된 체계 속의 일부로 살아가지만, 그 결과가 만들어낸 공간에서 얻는 박탈감이 언제나 내면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도시들의 소개서

     이 책에선 주로 유럽권의 도시들과 그 유럽의 식민지 도시들에 대해 주요하게 서술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동경과 북경 정도만 다루고 있어 서울이 등장하지 못한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이 같은 시기에 정말 도시이긴 했을지, 언제부터 도시가 되었을지도 대한 의문을 비교해 볼 기준점이자 척도로 살펴볼 수 있다. 작가가 밝힌대로 “어떤 도시들은 증기기관 같고 어떤 도시들은 시계 같은 것”(p.743)일지 도시의 발전 과정의 개별성과 유사성의 흥미진진한 프로세스를 즐기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선행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언제나 문명화를 구가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떤 계기가 그것을 일으켰는지, 그 일촉즉발의 순간의 상황들을 알고 나면 흥미로우면서도 의외의 허탈감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짚어야 할 지점은 그 도시화가 되는 분기점의 찰나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 이해를 극도로 단순화한다면 공간 관계의 ‘위계’ 속에서 발생하고 자본과 사람의 ‘흐름’을 통해서 태어난다는 점에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지금 도시들은 어떤 소개를 할까. 도시는 사라지지 않지만, 도시의 정체성은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질문은 굉장히 흥미롭다. “도시는 언제나 도시이다.”(p.697)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도시도 과거의 도시와 같을까. 그 질문의 답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도 계속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 내고 그리고 그것을 잘 정리해야 하는 몫이 새로 생겼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32070?scode=032&OzSrank=4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산업화 이전 시대인 15-18세기의 물질문명과 인간관계를 조망하고 있는 책이다.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3분 구조에 입각한 서술, 일상생활에 대한 치밀한 실증으로 15-18세기의 인간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www.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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