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에 대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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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다시 묻는다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편

    권재일 외

     

     

     

    "인간의 조건에 대한 다층적 가능성 "

     

    사람들은 언제 스스로를 인간으로 이해할까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의 근황 토크에서 그는 “맨날 기계처럼 일만 해. 감정이 고갈되는 느낌이야.”라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쯤 맘 편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지?” 라고 되물었다. 선배에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자유가 곧 인간성의 획득 과정이었다. 코로나 시대로 접어 들면서 근무환경이 유연해진 것을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이라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을 필요로 할까. 선배에게는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듯이 생물학적 신체는 인간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객관적 조건 뿐 아니라 주관적 조건이 상호 관계를 맺으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칼로 무를 베듯이 명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고 인정받는 조건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요소와 가능성이 수반된다. 최근에는 아예 신체조차 없는 로봇, 또는 인공지능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예리하고 날카로워지며 의식 속을 파고 드는 것 같다.  

     

    이러한 고민에 대한 화답일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교류 속에서 몇 번의 학술대회와 논의를 거치며 최종적으로 이 책을 엮었다. 그러나 이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명시적 답안을 내어 놓는 것이 목적이 아닌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더욱 치밀하고 다양한 질문을 덧붙이는 ‘과정’이었다. 인문대학 소속 14명의 저자들은 각각의 전문 연구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정체성, 영혼과 의식, 욕망과 좌절, 본성과 자격 등 크게 4가지로 분류된 카테고리 속에서 무엇이 인간임을 만들고, 어떻게 인간으로 존속할 수 있는지 논의하고 또 다른 새 질문들을 독자에게 던진다. 

     

    이것도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일까 싶을 정도로 그 논의의 범주는 무척 넓고 깊어, 읽는 이의 생각의 층위를 한층 두텁게 만든다. 평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분야 속에서 어떻게 (현재의) 인간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었는지 깊게 고민하게 해준다. 특히, ‘인간'을 논의하는 과정은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의 다층적이고 교차적인 집합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의 요인만으로 인간 또는 인간 외의 것을 논한다는 것은 단편적인 동시에 무척 어려운 과정이기에 이 책처럼 학제 간, 국가나 계층 간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국가 차원의 재난으로 큰 공간적, 사회적 단절이 생겨난 2020년 현 시점에, 그래서 더욱 의미를 가진다.  

     

     

    인간임을 인식하는 과정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어느 TV 속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도 ‘이게 모야?’인 것처럼 인간은 주위 환경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아마존의 알렉사, 애플의 시리 등 약(weak)인공지능과 우리와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답만 내리려고 할 뿐. 그렇다면 만약 그것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인간처럼 인식될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우리를 재현할 수 있다면, 같은 영혼이 있는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그것이 정교해질수록 양자를 구분할 수 없으리라 단언한다. (p.44) 그는 인간과 그 외의 것들의 차이를 가늠하는 것은 신과 영혼의 존재 증명으로 보았고 그것이 없는 것은 (설령 동물과 같은 생명체라도) 기계로 인식할 수 있는 논리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18세기의 보캉송이 만든 자동인형, 캠펠린의 체스 두는 터키인은 마치 영혼을 가진 기계처럼 보였고, 이는 라메트리의 견해(p.51)처럼 어떤 것이든 영혼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역으로 시사한다. 글에서 이영목 교수가 인간과 기계의 통일 가능성에 공포감과 앞으로의 기대감을 보였다면, 나수호 교수는 더 나아가 인간과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공정성, 투명성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알고리즘은 통제될 수 있고, 그것이 인간성을 획득하는 데에는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35) 인공지능은 하나의 인간을 돕는 도구로서 긍정적으로 기능한다는 인식에 나도 깊이 동의한다. 

     

    그렇다면 기계와의 비교가 아닌, 어떻게 그 자체로서 ‘더욱’ 인간이 되어갈 수 있을까? 그 과정 중 하나로 손영주 교수는 멜랑콜리가 아닌, 에로스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 상실과 소외, 불행을 겪으면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멜랑콜리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온 반면, 삶의 긍정적인 열정, 낙관적 믿음을 갖는 에로스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다루어 왔다면서, 에로스적 시각에서 주체적 인간의 삶을 가질 수 있는 과정을 열어 두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름다움이란 기존의 미적 규범과는 무관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것들”, “이질적인 감정적 요소들을” 가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다양한 유형의 즐거움을 받아들일 줄 아는 비이기심(unselfishness)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p.210-211)

     

    울스턴 크래프트가 냉정한 현실 인식에서 오는 역겨움을 이겨 내고 “즐거움의 새로운 원천들”의 마음을 키우는 것이라 했던 것처럼(p.202), 나 또한 내 감정에 대해 받아들이고,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저자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감정과 속내를 꽁꽁 싸맨 채, 사회적 웃음을 지으며 이성적 태도만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을. 무엇을 열렬히 좋아한다, 누군가를 깊게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것에 보이지 않는 죄책감을 가졌던 것을.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은 감정을 꾹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잘’ 표출하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 문학가 체르니셉스키가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인공이 꾸는 네 번의 꿈처럼(p.138), 삶에 대한 열정과 함께 기대, 꿈을 가지는 과정 자체가 스스로 인간임을 인식하는 주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과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 집에서 나와 길을 걷던 도중, 가로수 아래에서 흥미로운 낙서를 보고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다. ‘사람 되기 전 인간이 되어라 이 인간아~’라고 쓰인 문구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람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가 이야기한 인간은 어떤 인간인 것일까?

     

     

    어느 가로수 밑에서 본 낙서. "사람 되기 전 인간이 되어라 인간아~'

     

    그 장소가 쓰레기 무단 투기가 빈번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곳에 살고 있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단순한 그 행동에 화가 났던 것은 아닐까. 비슷한 관점에서, 이석재 교수는 그의 글에서 도덕적 존재의 조건으로 이타주의적 태도를 제안한다. 태도를 유발하는 목적을 근원적 목적과 방편적 목적 두 가지로 나누면서, 근원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진정한 이타주의적 태도로 인식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칸트가 제시한 개념인 ‘목적의 나라’를 설명(p.246)하며, 이러한 보편적 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인간이 되어가는 조건임을 제시한다. 그러한 논의를 확장하면, 반드시 생명체가 아니어도 된다는 열린 가능성도 아울러 상상할 수 있다. 꼭 생명을 가진 주체만 조건에 부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목적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타주의적 태도 이외에 어떤 추가 조건들이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인간이 아닌 존재라도 그 주체가 이타주의적 태도를 지닌다면 이 존재 역시 '목적의 나라'로 초대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직관을 가진다. 도덕적 존재의 핵심은 남을 위하는 마음에 있지,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p.252-253)

     

    대승불교를 널리 전파한 원효의 인간관 또한 유사했다. 그는 ‘일심(한마음)’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중생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구성원들 간 대립과 갈등보다 이타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p.65) 남동신 교수는 원효가 내세의 이상향보다는 현실 속 고뇌하는 중생들의 실존적 문제를 직시했다고 말하며 결국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타인과 함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평등하고 또 내가 고통을 경험하는 것만큼 타인도 힘들 수 있다는, 기본적인 의식을 공유되었다면, 유대인들이 2000년 넘게 포용과 배제를 반복해서 경험하는(p.70) 과정이 보다 빨리 종식될 수 있었을 것이다. UN 세계인권선언의 [제6조]인 “모든 사람은 어디에서나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처럼 사람과 인간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p.263) 중요한 것은 사람과 인간 사이에 어딘가에서 우리는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저항과 노력, 담론을 꾸준히 형성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다층적 가능성에 대한 이해와 실천

    다양한 인간 조건의 층위를 살펴보면서, 결국 이 책의 제목의 속뜻은 당신이 인간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각각의 글들이 담고 있는 공통적인 함의는 인간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묻는 과정이라고 느낀다. 때로는 욕망과 부, 개인주의적인 감정을 앞세우기도 하지만 곤경에 빠진 타인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점차 파편화되고 복잡해지는 사회관계 속에서, 각자 인간으로서 긍정적인 페르소나들을 구축하며 현 시대를 살아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연극에서 배우가 착용한 가면에서 유래한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에서 온 사람(person)이라는 지위가 시대에 따라, 주체에 따라 변해왔고 법적인 측면에서 그 한계도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에 대한 근거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김도균 교수가 그의 글에서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며 사람=person이 반드시 등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처럼 사람, 혹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수많은 관념과 속성들의 교차값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단일한 페르소나가 아니라 타인의 페르소나도 되어보면서 공감의 폭을 넓혀 보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지배로 향하는 첫걸음은 바로 사람에게서 법적 주체성을 살해하는 것이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통찰력은 '사람=person'이라는 등식이 가지는 가치가 관념적인 수사만 아니라는 점을 웅변해 준다. 그저 장식의 선언으로, 아름다운 수사로 무심코 넘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나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특정 속성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려는 지적 움직임과 법적 시도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다...사람이외의 존재들도 person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인간종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류의 오랜 염원과 고투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작업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인다. (p.273-274)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책을 읽고, 앎의 저변을 넓히는 노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질문이자 지식을 열람할 수 있는 수많은 창을 가진 집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를,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태도와 정체성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고 싶다면 한번쯤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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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다시 묻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서울대학교 교수 14인이 던지는 화두“인간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21세기에는 �

    www.yes24.com

     

     

    사진출처

    1. 영화 오블리비언의 한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INXqLdY2u0g)

    2.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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