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의 주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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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IT나 전자제품, 혹은 여러가지 기술적인 영역에서 나라, 혹은 기업들의 주도권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하지만 ‘감성’ 에도 분명 주도권이 있다. 최근 워싱턴 주의 시애틀, 그 밑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를 필두로 한 미국 서북부의 문화적 영향력이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바탕 휩쓸고 간 잡지 킨포크, 미국 전역에서 가장 핫한 커피가 된 스텀프커피, 부티크 호텔의 살아있는 표본이 된 에이스 호텔까지, 이 지역에서 탄생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밖에도 이 곳에는 크고 작은 독립샵들과 문화적인 씬들을 주도하는 디자인 회사, 또 흥미로운 공간들이 연달아 이어져 이곳 만의 장소적 특질들을 형성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것을 보고 느끼러 가는 것이 당연한 순례 코스처럼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잡지 킨포크가 포트랜드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포틀랜드의 태생(지리적 위치와 산업)과 북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 그리고 그로 인한 독립적이고 독특한(어떻게보면 매우 꼬장꼬장한 로컬리티) 문화 등이 뒤섞여 정체성을 형성하고 결국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킨포크의 세컨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Ouur를 일본에 처음 런칭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뒤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힘과 영향력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고 자연스럽게 그 힘은 여러가지 의미로서 주도권을 잡는다.

     

     시대의 흐름을 살펴보면 삶의 감성에도 트렌드라는게 존재했다. 과거 런던에서 나타났던 모드족이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등장했던 히피족들처럼 시대적, 문화적, 환경적인 배경에 따라서 각기 다른 그들의 삶과 그 방식들이 주목을 받았고 그런 흐름들은 현재에도 꾸준히 이어진다. 물론 과거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그런 흐름들이 굵직한 두께감으로 나타난 것에 비해 요즈음에는 얇으면서 자잘한 방식으로 세계의 도처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에서 모두 세계가 지역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하였고 경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중국이나 인도, 혹은 동남아시아까지 그들만의 삶의 방식들이 주목 받고 있다. 그런 장소와 삶이 좋아서 무작정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사람들도 늘었고, 매체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소소한 장소와 지역들까지 우리의 근처에 다가오게 되었다. 탈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지역들이 탈바꿈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하는 사례들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씬을 주도하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이점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모노클의 편집자 타일러 브륄레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고 한다면, ‘일본타입’과 ‘인도타입’ 이 있다고 했는데 무언가 살짝 반감이 생기면서도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점이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취향이나 스타일, 선호도가 자연스럽게 속하는 곳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는 둘째 치더라도, 일본이 여러가지 문화의 정점에 위치하게 되어 얻는 이익은 어마어마하다. 세계의 많은 문화, 예술, 그리고 삶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은 일본이라는 거대한 창구에서 들어가고 나온다. 일본이라고 한 나라의 단위로 뭉뚱그려 표현하기에는 애매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동경하고 존중하며 또 소비한다. 서양의 대부분이 한 나라의 단위보다 도시, 지역으로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느낌이 강한데 비해 일본이나 인도는 한 국가의 단위로 그 힘이 느껴진다. 그만큼 지역적 차이보다 민족과 국가적인 차원에서 특별함이 존재하고, 그것이 어느정도 단일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기술적인 영역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선후관계가 비교적 모호한 디자인이나 예술 분야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런 차이들이 확연하게 전해진다. 깊이라던지, 일관성, 혹은 독창성에서 분명한 차이들이 있다. 우월함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진다고 하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다녀볼 때 오히려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진지함과 깊이를 발견하고 우리는 감동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갖지 못한 단편적인 요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너머의 뚜렷한 그들만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 이익은 단순히 금전적인 부분 이상으로 사회적인 행동방식, 문화,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다. 멋들어진 물건, 공간 혹은 예술품 하나가 아니라, 그것이 나오게 된 그 환경과 문화까지 좋아하고 환호하게 되는 것. 그런 현상들을 보고 있으면 부러움을 넘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왜 우리는 저렇게 할 수 없는 걸까.

     

     예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냉정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는 해외에서 선전하는 대기업들을 보며 알게 모르게 자부심을 느낀다. 여행을 가서 가장 먼저 반가움을 느끼는 것 중 하나도 것도 공항에 걸려있는 대기업의 제품 홍보 광고일 것이다. 이제 순수한 의미로 국내의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반가운 이름이 타국에 걸려있는 것만으로 뿌듯할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세계의 기업들, 브랜드들이 국가를 넘나들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펼쳐나간다. 이 때 어마어마한 자본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장할 때 각 지역에 적응할 수 있게끔 맞춤형 사업을 전개하곤 한다. 이를 글로컬라이제이션 Glocalization 이라고 부른다. 소니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가 만들어 냈다는 이 용어는 Global과 Localization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비슷한 의미로 일본어는 dochakuka, 한국어로는 세방화 (좀 구리니까 그냥 영어로 쓰겠다) 라고도 하는데 글로벌이 앞서서 붙어서일까, 그 관계가 갑과 을의 관계와 유사하다. 우리 주위의 대부분의 글로벌 브랜드가 그렇듯이, 기존의 컨텐츠나 가치는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통일하되, 세부적인 사항이나 마케팅, 가격 등은 현지에 맞추는 것이다.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월마트 같은 것은 물론, 심지어 미키마우스와 같은 케릭터도 글로컬라이제이션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는 당연히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범준 형과 함께 중국으로 갔을 때, 그 단적인 예를 경험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날, 운남성 쿤밍에 도착한 우리는 피곤에 지쳐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중국어를 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견한 맥도날드는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았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곳과 동일한 공간, 동일한 음식, 심지어 동일한 서비스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편안함을 느끼며 새삼 맥도날드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리고 스타벅스는 방황하던 불쌍한 우리를 위해 낯선 곳에 내어준 작은 보호소였다. 오버같지만, 그 순간만큼은 컵에 그려진 인어를 세워두고 절을 할 수도 있었다. 스타벅스의 여신에게! 시애틀의 방향을 향해서 말이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스타벅스 안의 공간은 같은 중국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밖의 외부 환경과 너무 달랐다. 너무나 익숙한 방식과 인테리어 속에서 나는 웃기게도 서울의 강남 어딘가를 떠올렸다. 그동안 한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내가 원래 속해 있던 공간을 말이다. 마치 공상소설에서 그려지는 포탈 속을 넘나든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이런 나의 호들갑스러운 경험은 (하지만 누구나 했을) 사실 엄청난 습득의 결과일 것이다. 평소에도 종종 가던 곳들이었으니 익숙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반가움과 고마움이 배가 된 것이다. 꼭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유럽이나 일본 같은 곳을 가더라도 이러한 곳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나라, 도시에서 으레 꼭 한번씩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방문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불확실함을 참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낯선 곳에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중요한 장소로 기능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마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역시 여전히 다양성과 지역성을 해친다는 공격을 피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것이 전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난을 극복할 만한 다른 확실한 대안은 거의 없다. 우리가 익숙하게 신문이나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과정처럼 지역들의 요충지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익숙한 간판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하나의 공간에 둘이 있을 순 없기에 기존에 있었던 지역의 가게나 소규모 상점들은 밀리듯 쫓겨날 수 밖에 없다. 사실 글로벌화의 또 다른 이름은 표준화, 평준화일 것이다. 누구는 이것을 통틀어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라며 (그보다 더 큰 맥락이긴 하지만) 비판을 늘어놓고 혹은 누구는 그저 악마같은 대형자본과 기업들의 탐욕으로 그 탓을 돌린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현상이 무조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우리가 막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좋아하던 까페나 음식점, 장소가 사라지는 것을 워낙 많이 봐왔고 그럴 때마다 아쉽고 화도 났지만 무조건적인 비난과 보이콧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또 그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내 주체적 의지와 판단력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쉽게 말해 내 만족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저절로 발길이 더 이상 닿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그곳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집 앞 스타벅스가 어느 한 순간에 사라졌듯이.  

     

     그저 입지적 조건 등으로 인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면, 대개 각각의 장소는 그 고유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다. 물리적 조건일수도 있고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민족적 특성 등 다양한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며 그 정체성을 드러낸다. 정체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모이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 장소와 공간에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꼭 그곳에 오래 거주하거나 관계있는 사람들로 인해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으로 말하면 단순히 동네성을 강화한다던지, 지역을 법적으로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필요조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조차 허물어지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지역과 지역 간의 경계를 규정하고 고유의 특징을 애써 부여하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말이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저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장 필요하다.  

     

     비단 장소와 공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이라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쌓인 것들 자체로 그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정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테이스트를 확보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무엇이 좋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마음의 씨앗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나, 우리만의 방식으로 좋음을 다른 시각의 잣대로 애써 부정하지 말자. 이 세상에는 완전한 나쁨도, 완전한 좋음도 없다. 중요한 것은 좋다고 느끼는 것은 극한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고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고쳐나가려는 지단한 노력이다. 그러한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질 때, 우리는 우리만의 감성을 다듬어갈 수 있게 된다. 바보같이 형식이나 형태, 공간, 삶 그 자체를 규정짓고 보존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이 정말 좋다면 계속 좋게 즐기고 만들어나가자는 말이다. 물론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당연히 수반되어야 한다(무언가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에는 그 기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좋아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때, 새로운 기준과 감성이 피어나게 된다. 오리지널과 알듯 말듯 모르게 닮으면서 다른 것. 삶의 전반에 걸쳐서 그것들이 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차원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고 이는 곧 감성의 주도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다른 나라, 문화, 사람에게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 쿨하고 멋져 보이도록 하는 것. 감성의 글로컬라이제이션을 할 수는 없을까. 로컬리티의 글로벌화. 곧 콘트라-글로컬라이제이션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느끼는 감각과 삶을 이해하고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깊이 출발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 느낌을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의’ 감성을 획득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테니, 너무 고민하지 말고 믿고 나아가고 싶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있게 알아가며 다듬어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즐거운 노력들을 해나가면 되는 것일 테다. 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진실된 감성의 주도권을 획득한다면, 이는 곧 모든 곳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나와 내 주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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