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의 지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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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외모, 완벽한 스펙, 완벽한 재능, 완벽한 삶….

     

     아마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한번쯤은 ‘완벽’한 무언가를 꿈꿔 보았을 것이다. 퍼센테이지로 본다면 100%에 가까운 그런 무언가. 조금만 더 나아지면, 조금만 더 쌓으면, 조금만 더 가지면 가능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 완벽함을 위해 욕망이 생기고 희망을 그리고 또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벽이라는 단어만큼 완벽하지 않은게 또 있을까. 완벽함이란 완전무결, 즉 변하거나 없어지는게 없고 모든 것이 온전하게 있는 것을 뜻하는데, 따라서 뜻 자체에 이미 가정의 조건을 담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삶의 차원에서 완벽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 현실 속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허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완벽함’은 보다 소박(?)하기는 하다. 다양한 욕망을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인 삶만 되면 된다고 대부분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애매하고 찝찝하다. 길게 살지 않은 삶을 돌이켜 보건데, 어떤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그것에 만족한 적이 있었던가? 어릴 적 갖고 싶은 장난감을 두고 엄마와 밀당을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호되게 혼난 기억도) 나이가 늘어날수록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만 늘어나 버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늘어난 욕망의 수만큼 마음 한 켠에서 허전함도 같이 커진 기분이 든다. 그것은 일종의 허무함인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같은 감정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소유한 것, 혹은 경험의 증가의 정도와 만족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누구나 손에 넣기 전까지 무언가에 기대한 만족감이 막상 얻고 나면 그다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그 당시에는 간절하게 원하던 무언가가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필요가 없어진 때도 있다. 한 때 유행하여 충동적으로, 남들에게 이끌려 산 청바지같이 말이다. 

     

     한편으로는 큰 간절함 없이 사거나 얻은 물건, 경험들이 오히려 오랫동안 소중하게 남을 때도 있다. 계속 쓰다 보니, 또 돌이켜 보니 괜찮은 것이었을 때 우리는 순간적인 만족감과는 또 다른 지속적인 만족감을 느낀다. 둘의 차이는 순간적인 만족감이 그 때의 기분이나 유행, 사회적인 흐름에 보다 영향을 받는 것에 비해 (설령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만족감이라는 부분은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측면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개개인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고 각각의 취향이나 습관 등이 반영되게 된다. 

     

     이 자연스럽게 만족한다는 것은 결국 어떤 것에 대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만족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강도가 강렬하지는 않아도 오래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시간이라는 변수 아래에서 결과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신뢰(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 간의 신뢰도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듯이 어떤 특정 상황, 혹은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기대하는 쓰임을 갖게 해 줄 때, 그것이 설령 말 못하는 감정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괜시레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말도 걸어보고 싶게 하고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내가 쓰던 카메라가 그랬고 청바지가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감정이 오랫동안 생겨날 때, 자연스레 신뢰라는게 생기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오랫동안 이루어질수록 만족의 지속성은 깊어지게 된다. 애착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무엇이든지 ‘본질’에 가까워져야 한다. -다움이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이 본질적인 것은 제대로 됨이라는 것과 닿아 있기도 하다. 물론 그것 만은 아니다. 그 본질이 ‘개성’을 가지고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성이 있기 때문에 삶이 풍부해지고 사람들의 선택에 따른 그 관계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이라는 뿌리가 제대로 갖추어지고 깊게 자라지 못하면 그 위의 개성이라는 열매는 좋은 것이 열리지 못한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도 맛없는 열매를 먹게 될 수 밖에 없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이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어느 곳에 어떤 비율로 힘을 실을 지는 다를 수 있지만 본질적인 부분이 흔들리는 순간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명심하고 싶다. 본질에 가까울수록 그 자체로서 개성이 발현되기 마련이다. 때로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니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우리, 사람에게 있다.  

     

     만족감의 종류를 나눈다는 것이 어쩌면 애매하고 명확하지 못한 생각일 수는 있지만 나는 그렇게 나뉜 그것들의 균형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때,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개인의 삶의 욕구들을 충족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욕망을 실현시켜 나아갈 때 우리는 보다 각자의 삶을 방식들을 스스로 획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무분별한 욕망의 추구가 아닌,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스스로가 이해하고 알게 되기에 보다 줏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서 ‘완벽’ 하게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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